[묵상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전봉석 2022. 8. 9. 05:04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왕하 14:13-14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참혹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의 반목과 시기와 다툼이 그치지 않는다. 북이스라엘 요아스 2년에 남유다 아마샤가 즉위하여 다스린다. 같은 민족이나 다른 국가와 다를 게 없이 서로를 공격하여 아마샤는 왕권을 견고히 하고 부친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을 죽인다. 그리고 선전포고를 한다(8). 그리고 에돔을 파하고 교만해진 아마샤를 북이스라엘 요아스는 조롱한다. 그리고 선제공격하여 남유다를 공격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 성전의 기물을 약탈하고, 왕과 백성 일부를 인질로 잡아 사마리아로 간다(11-14). 남유다 10대 왕 아사랴가 즉위한다.
 
먼저 남유다 아마샤가 북이스라엘에 용병을 고용하여 에돔을 징벌하였던 것이고, 한데 전쟁에서 그냥 돌려보냄으로 용병들이 그 불만으로 남유다 예루살렘 성읍을 약탈하고 같은 민족이라 다른 국가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죽였다. 이에 아마샤는 에돔을 정복한 후 교만하여져 북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대하 25:5-16). 하여 북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고 남유다의 왕 아마샤를 포로로 잡혀갔으나 저보다 15년을 더 살며 남유다로 돌아와 살았다. 이 전쟁은 B. C. 783-872년에 있었다. 하나 아마샤가 피살된 것은 저의 배교로 인함이다. “아마샤가 돌아서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였으므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그의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유다 성읍에 장사하였더라(대하 25:27-28).”
 
일련의 사실을 읽다보면 사람의 악함과 그 죄악은 끝이 없다. 그런 가운데 참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만을 바라는 성도로서는 참고 또 인내하여야 한다. 오늘 8절에도 보면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왜 저가 악을 발하여 같은 민족에게 전쟁을 선포하는지 애매하다. 에돔을 징벌 후 교만하여져 북이스라엘 용병들의 행태에 대한 보복이었다 해도, 엄연히 10만의 용병을 고용하였다가 그냥 돌려보내니 그럴 만도 하다.
 
얽히고설킨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악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에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마땅히 본때를 보이고 분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도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20:22).” 이는 성경의 지침이고 신앙의 기본자세가 된다. 이에 자신의 영광이 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19:11).”
 
필리핀 사역에서 잠시 비자 문제로 들어왔다 같이 돌보던 아이로부터 터무니없는 고소를 당하고 출국정지가 된 동생을 보며 생각이 많다. 그야말로 생각 같아서는 같이 들추고 뒤집어 같이 공격하고 싶은데, 주님은 참으셨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셨다. 이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 하나님이 하시게 함으로 뒤로 물러나 그 마음을 추스르는 데 있어, 사모는 15년 사역의 모든 게 다 허무하여 우울해 하고 동생은 어찌할지 몰라 그저 눈물만 흘린다.
 
듣다보면 소를 제기한 아이도 아이엄마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생활면에서도 그러하여, 이를 같이 상대하자면 저들의 그런저런 면을 같이 들추며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데… 그것만은 피하려고 수모를 참고 또 참는다. 한데 저쪽에서 무슨 일인지 변호사까지 샀다고 하니, 다음 행보를 두고 그저 마음만 아프다.
 
어찌 해야 할까, 하고 서로가 이야기할 때면 그렇다고 같이 진흙탕 싸움질을 할 수도 없고 더욱이 그 아이의 영혼이 마음이 걸려 안타까울 따름인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이에 말씀이 때론 버겁다. 곁에서 같이 당하는 모 집사 내외는 같이 더 갑절로 혼쭐을 내야 한다고 준비 중인 것 같은데, 이를 오히려 말리며 주의 뜻을 구하고 있으니.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말씀 가운데서 우린 그야말로 묶인다. 생각 같아서는 같이 대응하여 보복하고 응징하고 싶으나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나의 마음을 어찌 아시는지, 오늘 아침 말씀이 나를 붙들어 앉아 마음을 진정케 하신다. 다만,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141:5).
 
우리로는 주를 부르며 주께 아뢰어 이 일의 의도와 섭리가 무엇인지를 주목한다. 공격하는 저들 눈에는 이런 모습이 오히려 아니꼽고 한심하여 더욱 그 감정을 자극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 25:12).”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에 마음을 둔다. 이 사람 저 사람 말 들으면 같은 꼴로 으르렁거리는 수밖에 없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27:5-6).”
 
종일 억수로 비가 내렸다. 북쪽의 강한 찬공기와 남쪽의 뜨거운 공기가 서로 부딪쳐 한반도 특히 중부지방에 걸쳐 많은 비를 쏟고 있다고 하였다. 마치 우리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도 같은 것 같다.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따져 스스로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에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 어렵다. 이를 통틀어 교만이라 하는데,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11:2).” 지혜자의 여러 교훈이 새삼 크게 들린다. 우리가 하면 안 될 일을 두고 씨름한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옵 1:4).”
 
누가 어디 강력계 형사를 아네, 변호사를 아네, 하면서 설왕설래 말들이 오가는 것 같은데 ‘전에 당신 같았으면 가만 안 있었을 텐데’ 하는 아내의 말에 나는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에 놀란다. 생각 같아서는 본때를 보여 아주 죽사발을 만들고 싶은 심정인데…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0-21).” 주께 맡긴다는 것, 나의 감정을 죽이고 또 죽여 나의 생각에 이끌리지 않는 일로,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주의 은혜를 구할 따름이다.
 
북이스라엘의 공격이 남유다의 선전포고 때문이었든, 저의 선제공격으로 인한 것이었든, 감정적으로의 판단은 이와 같이 같은 민족이라도 가차 없고 가혹하다. 이를 보며 순간의 감정이 영원을 사모하고 그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하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우린 무엇을 바라보고 가는 것일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그러니 아이 아빠와는 이혼하고 그 사이 두 번의 결혼생활이 있었으나 아이가 필리핀에 나가 있는 동안 만났던 남자로부터 무슨 사기까지 당해 돈을 뜯겼다는 소문도 있는데… 저의 황폐한 영혼이 분풀이 대상을 고른 셈인데, 하필 자식을 맡아 그나마 애를 쓴 주의 종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 누구보다 그 사정을 다 아니까 더 안 됐고 답답하여 어떡하든지 화해하고 타협하기를 원하였는데… 저도 그 주변에서 부추기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다. 결국 우리로서는 하나님만 의지할 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46:1).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62:7).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142:5).
 
그저 묵묵히 주의 말씀만을 붙들으며,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89:28-29).
 
주의 말씀은 영원하고 그의 약속은 유효하다. 주는 우리로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 16:60).” 주가 하신 말씀이 있다. 이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이를 어찌 사람의 마음으로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사람으로서 할 수 있겠나? 같은 민족끼리도 선제공격을 서슴지 않고 약탈과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본문을 보며,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42:1-2).
 
오늘 시편의 기도가 더욱 애간장을 녹이는 듯하다. 우리의 타는 듯한 갈급함은 주 앞에 호소함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저들과 같이 서로 맞대응을 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묵묵히 참고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이에 그 영혼의 갈급함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36:8).
 
주가 주시는 알 수 없는 평안함으로 승리한다. 현실은 그와 반대로 흘러가서 우려와 걱정이 옥죄는 듯하나,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 21:6).” 주가 갚으실 것이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3).
 
사모는 자꾸 마음이 상해 그 슬픔을 추스르느라 애쓰고 동생은 그 영혼을 안타까워하며 어찌 할까 속만 태우고, 나이 드신 부모나 주변 가족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으뇨’ 하는 소리로 괴로움을 겪고 있으니. 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하여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9-11).” 이와 같은 말씀이 아니면 우린 무엇으로 견딜까?
 
주는 분명히 일러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우린 주만 바라며 주의 자녀임을, 사명자임을 그 마음에 되새길 뿐.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37:28).
 
이에,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
 
여태 해 왔던 일이 허무하기만 하고, 사람 참 가치 없다는 생각이 미혹하듯 우리 안에 실망과 미움을 더할 때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11).
 
오늘 말씀이 나의 이 모든 심정을 아시고 기다렸다는 듯 위로로 감싸신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3).
 
행여 나의 마음은 이 일로 사람에게 드는 환멸이 동생의 남은 사역을 감당하는데 걸림이 되고 고통을 더할까 하여… 물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주께 바라고 또 구하며,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 2:7-9).” 요나의 기도를 생각한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6-7)
 
오늘 시편의 교훈이 크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 우린 다만 그럼에도 저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며, 부디 저들이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그러함을 두고 슬퍼한다. 다만 우리는,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8).
 
아니면 우리가 이 길을 어찌 갈까? 억울하고 분해서 어떤 분풀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야 어찌 주의 사랑을 품고 살 수 있을까?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9-10).
 
그러므로,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31:7-8).
 
이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말씀으로 말씀 앞에 세우시는 것이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9-10).
 
주가 오늘 예비하여 들려주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주를 바란다. 그리고 내게 일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