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전봉석 2022. 8. 10. 04:5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왕하 15:37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남유다 아사랴가 52년 유다를 다스렸다. B. C. 791-939년의 일이다. 한데 저는 산당을 헐지 않아 하나님이 저를 치심으로 문둥병자로 별궁에 거하고 그의 아들 요담이 섭정하였다. 55년을 통치한 므낫세 다음으로 긴 통치를 하였으나 평생을 나병환자로 살아야 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스가랴 선지자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블레셋도 정복하고 암몬으로부터도 조공을 받는 부국으로 강성하게 하였다. 그러다 스가랴 선지자가 죽자 저는 직접 자신이 제사장 직무까지 맡아 하려다가 문둥병으로 하나님이 저를 치신 것이다(대하 26:1-23).

 

하나님 앞에 정직하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 정직하다는 것과 다르다. 하나님은 정직하시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6:18).” 우선 우리의 정직은 하나님을 앎으로 그 하나님과 같이 행하여 숨김이 없이 사는 삶을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11)

 

그럼 우리의 정직은 무얼까? 주를 안다는 것은 경외함으로 주께 아뢰는 기도의 삶이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2:7-8).” 그리하여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예비하신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97:11).

 

마치 농부가 씨앗을 뿌리듯 빛과 기쁨을 뿌리시는 것으로 이는 더욱 자라고 풍성하여진다. 곧 우리의 기도는 그 능력이 크다. 가만히 주 앞에 아뢰는 일, 어떤 일에 대책을 마련하고 대안을 강구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궁리하는 일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이어 주교가 된 에라클라우스는 서기 430년에 설교하기를 “귀뚜라미는 울어대지만 백조는 침묵한다.”고 하였다. 이후 1415년 7월 6일, 얀 후스는 로마 가톨릭의 면제부를 비판하다 화형을 당하면서 “오늘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죽이지만 백 년 후에 당신들은 백조 한 마리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이를 잠자코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외친다. 자신의 이름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란 뜻이다. 이어 1531년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손으로 이 일이 성취되었음을 설교하며, “얀 후스가 한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백조의 노래’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 재해석하였다. (존 파이퍼, <고난의 영웅들> 참고).

 

곧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하여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그리고 국교회에 맞서 설교를 하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천로역정> 외 다수의 묵상 글과 설교 글을 쓴 존 번연.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면서도 수백 편의 찬송 시를 지은 윌리엄 쿠퍼. 인디언 선교지에서 채 5년의 선교사역을 감당하다 폐렴에 걸려 죽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그리고 1725년부터 1807년까지 살면서 노예무역선 선장으로 살았던 존 뉴턴이 회개하고 목사가 된 후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찬송을 지은 것. 또한 복음주의 영국 국교회 목사로 진리만을 설교한다는 이유로 12년 동안 교인들이 예배를 거부하는 가운데서도 묵묵히 54년을 목회에 전념하였던 찰스 시미언. 그리고 1807년부터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대한 반대 법안을 놓고 30년간 싸웠고, 노예제도 자체를 불법으로 선언하기까지 또 26년을 싸웠던 윌리엄 윌버포스…….

 

어제는 이들에 대해 읽으며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였다. 오늘은 강원도에서 친구가 온다 하여 설교원고 초안을 보다 서둘며 찾아본 것이다. 시편 102편의 표제는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이다. 모든 고난은 의미없이 오지 않는다. 죄로 인한 것이든 주의 뜻을 확장하시기 위한 것이든 우린 다만 백조들과 같이 침묵하며 주를 바람으로, 정직은 무던하고 꾸준한 것으로 기도-찬송이 그 영혼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11:7).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64:10).

 

곧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정직을 행함인데 이는 단순히 사람들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 때론 침묵함으로 그 깊은 노래를 주 앞에서 부를 수 있다. 이를 기도로 표현하는 시편의 놀라운 주목이 생각하기를 멈추게 한다. 하고, 이는 다시 삶으로 드러나면서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33:15-16).”

 

앞서 믿음의 영웅 고난의 영웅들을 살펴보면 그때마다 마음이 새롭다. 스가랴가 죽자 스스로 왕과 제사장직을 겸하여 행하려 했던 아사랴의 처신은 결국 산당만은 제거하지 않음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기를 포기하지 않은 까닭이다. 저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면 이 또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임을 알았을 텐데, 곧 정직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을 때 우린 스스로 높여 하나님의 뜻을 저해한다. 이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우리가 주의하고 또 사려 깊게 행하려 함은 ‘저 한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 때문이다.

 

고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이는 매우 어렵다. 삶으로 받기가 쉽지 않다. 행함으로 그 마음에 이는 온갖 상념을 제하기가 불가능하다. 이를 참기 어려우니까 스스로 타협하고 묵인하고 같이 동조하는 게 ‘산당’이 내포하는 의미다.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되 산당만은 그대로 가지고 싶은 게 모든 왕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한데 성경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3-14).”

 

나는 가끔 쑥맥, 호구, 바보 같을지언정 주 앞에 무던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남들 이목이나 나의 성취욕과도 싸워야 하는 일이지만… 강원도에서 몇 시간이 걸려 나를 만나려고 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우리가 주 안에서 소통하고 그 관심이 하나님께로 향하면서이다. 굳이 만날 게 뭐 있나? 요즘은 전화에 줌으로까지 화상으로 만나 통화할 수 있는데도 얼추 왕복 여섯 시간을 들여 오고가고 하는 데 있어, 이번에는 내가 가볼까 하는 데 그 마음이 여의치 않자 저는 개의치 않고 그리하겠다고 한 것이다. 나는 이유를 바울이 전한 말씀에서 찾았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몬 1:6).”

 

저가 나를, 내가 저를 대하는 데 있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1-4).” 곧 우리가 주를 경외하고 주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주가 싫어하시는 일, 우리 곁의 ‘산당’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자기추구와 그 확신이란 이름의 산당, 자식과 가족사랑이라는 산당, 더 나은 삶을 이루려 세상을 향하려는 산당, 돈과 직업과 명예와 자기만족이라는 산당…… 숱한 우리의 산당들은 여전하여, 하나님을 믿되 ‘산당만은’ 하고 놓지 않으려는 자기 의지가 문제였다. 이로써 우린 적당히 어울리고 타협하며 ‘그럴 수 있는 일’을 ‘산당’ 안에서 행한다. 모든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공통된 지적 앞에서, 아 이 일이 사람으로서는 스스로 없이할 수 없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때에 서로가 대면하여 호흡하며 눈물을 짓고,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두고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

 

지난 주간 가까운 교수의 방문과 저의 말 중에 자신의 연구실이 그러하기를 위해 기도한다는 데서 알았다. 이를 위해 저는 한 사람 한 사람, 저들의 처지나 그 상황을 마음에 담아두고 산다. 속이 볶이고 마음이 어려우면 자연스럽게 저를 위한 기도가 나온다. 겉으로는 우리가 백조와 같이 침묵하나 그 내면으로는 끊임없이 주께 아뢰고 또 고하며 속이 시끄럽다. 마치 평온한 백조의 우아함이 실은 물밑으로 바동거리는 저의 발놀림과 무관할 수 없는 것으로 거꾸로 가는 세상에서 침묵할 수 없다고 외치는 자를 행하여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6-7).” 이에 지혜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또, 또 같은 일을 되풀이 하고 후회가 회개로 주 앞에 매일 같은 이유로 드려진다 해도, 이것이 성경을 인정하는 삶으로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6-17).”

 

설마, 하고 ‘산당’을 그대로 두고 사는 삶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그 어떤 선행과 의인으로 살았다 해도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 그러니 어제는 ‘귀뚜라미는 울어대지만 백조는 침묵한다.’는 문장을 새삼 노트에 옮겨 적고 여러 번 되뇌며 그에 따른 믿음의 위인들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118:8-9).

 

그러므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이어지는 이와 같은 말씀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마음이 어려우면 어려운 마음으로 주를 신뢰한다. 악은 다만 잠시 동안의 형통함이 있을 뿐,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욥 20:5).” 하여 시편은 이를 알린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73:19-20).

 

저는 앞서 잠깐이나마 저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다 미끄러지고 넘어질 뻔하였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2-3).

 

오늘 시편도 이를 일깨우듯,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43:1).

 

우리가 주 앞에 정직하다는 것, 주를 경외함으로 주의 기쁨이 된다는 것, 이는 주께 아뢰고 기도함으로 주만 신뢰함이었다. 곧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묵상하고 또 되새김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이에,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35:24).

 

삶은 우릴 속인다. 이를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프쉬킨은 시를 지어 알렸다. 신앙도 종종 우리 생각과 다르게 어떤 결과가 났을 때 우린 당황한다. 나름 주 앞에 정직하고 성실하기를 온 마음을 다했으나 주는 마치 외면하시는 것 같을 때,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2).

 

오늘 시인의 호소가 우리 안에서도 인다. 할 때 욥의 기가 막힌 신앙고백,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이는 어찌 그러할 수 있는 것일까?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나는 요즘 일련의 상황들을 접하면서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승복한다. 하면 오늘 시편은 우리 삶이 어떠한가를 노래한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3-4).

 

오늘,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곧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부디 나의 남은 생은 모두 그러하여서,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곧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여기가 전부가 아니다. 우린 다만 순례자요, 나그네였다. 마차를 타고 가든 수레를 끌고 가든 이 길은 끝이 난다. 언젠가 우린 모두 주 앞에 서야 할 것이다. 할 때에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곧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5:7).

 

이와 같은 고백이 항상 내 것이기를. 그리하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