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전봉석 2022. 10. 14. 05:18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대하 26:4-5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시 108:4

 

 

모두의 결국이 어쩔 수 없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긴 오죽하였으면 바울은 나이 들어서도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였다고 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남유다 제 10대 왕 웃시야(B. C. 791-739)에 대해 읽다 오늘은 새삼 저의 순수함을 엿본 것 같다.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대하 26:10).” 곧 저는 농부로 살면 참 그 한 생이 고요하였을 사람인데… 문득 얼마 전에 다시 읽은 이정명의 <뿌리 깊은 나무>에서 이도, 세종대왕이 떠올랐다. 저는 소리와 음을 통해 글자를 만드는 데 전 생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웃시야를 읽으며 특히 저가 농사를 좋아하였다는 데서 한참을 머물며 여러 생각이 오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처럼 나 좋은 시간에 일어나서 교회로 나온다. 이른 새벽이라 이 공간은 더욱 고요하다. 물과 두유를 하나 마시고, 오늘은 커피를 따뜻하게 데워 곁에 두고 앉았다. 자판을 끌어와 노트북으로 오늘 묵상하는 성경을 펼치고 어제 읽으며 메모하였던 몇 장의 메모지도 곁에 두었다. 나는 이 평온함을 사랑한다. 몸도 적당하다. 마음은 곧 또 어떨지 몰라 눈 뜨면 먹는 안정제를 먹었다. 평소에도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특히 지금 이 시간을 좋아한다. 아직 누구 생각도, 어떤 소식도 떠올리지 않고 오롯이 나와 하나님 단 둘의 시간이다. 오늘은 아직 몸도 괜찮고 마음도 평온하다. 웃시야와 세종의 어떤 시간, 특히 농사를 좋아하였다는 데서 그 고요하였을 마음을 생각하다 이러고 있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을 다스렸다. 그의 곁에는 스가랴가 있었고, 그의 일대기는 이사야가 기록하였다.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정직히 행하며 선정을 베푸는 왕이었다. 그러나 저도 말년에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16).” 함부로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 이상을 행사하다 제사장 고유의 권한인 성전에서의 분향하는 일을 하려다 나병환자가 되었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17).”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 때, 지금 이 평온함까지도 주의 것으로 알고 감사히 받는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기를 즐거워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도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2-6).”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데까지도 하나님은 복에 복을 더하시길 원하신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도 지켜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바울의 애통함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저의 탄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러니 우리가 한 시도 마음에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더러는 혼자 있는 시간이 유익하면서도 위험하다는 생각을 한다. 혼자 있는 시간에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작성하고 그에 따른 책을 읽거나 누구의 설교영상을 보거나 여러 다양한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이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이와 같은 시간이 지속되는 데는 같이 이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이를 다시 개역개정 전의 성경으로 읽으면,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4-5).” 곧 서로의 교제가 필요한 것이다.

 

더러 이것이 어려워졌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런저런 말을 소소하게 나누기가 서로 주의하게 되면서이다. 지난주에 누가 다녀갔을 때 전에는 편하고 스스럼없던 사이가 이제는 서로 어려운 것이다. 특히 저가 어찌나 목사님, 하면서 깍듯이 예의를 갖춰 대하는지… 서로가 그렇게 선을 지켜 예를 다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웃시야의 타락은 그런 가운데서의 일탈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소임을 다하면서도 월권을 하는 데 있어 객기 같은, 그러다 결국 나병이 들어,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21).” 그렇기는 하였지만…….

 

공연히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도 마음을 잘 다스려 생을 다할 때까지 나를 온전히 붙들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정말이지 아차, 하는 순간의 일이다. 경건은 날마다 매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연단하다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표현보다 정제된 느낌이 든다. 하여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결국은 자라가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이에 요동치 않도록 틈을 주지 말아야 하는 일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오죽하면 이렇듯 강경하게 전하는 것일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29).”

 

웃시야의 한 순간이 아쉽고도 안쓰럽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때로 세상 즐거움을 모두 버린다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 생에 가능하기 위해서는 삼위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곧 내 스스로 자라갈 수도, 연마할 수도, 은혜를 끼치는 자로 살 수는 없다. 좋을 때야 누구라도 너그럽지 않을까? 이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무슨 말씀인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의 내용으로 쉽게 읽어내면 그런 말이다.

 

우리에겐 성부하나님의 돌보심과 성자하나님의 덮어주심과 성령하나님의 지속하심이 필요하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예수께서 우리 죄를 덮으셨다. 우리는 거듭남으로 성령이 이를 지속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이에 시인의 찬송처럼 하나님은 우릴 돌보신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8:4).

 

때론 나 같은 게 뭐라고 주께서 이리도 귀히 여기시고 돌보시는가? 하는 감격스러움에 찬송이 저절로 나오기도 하는데,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144:3).

 

우린 주의 돌보심과 덮으심과 지속하심으로 믿음의 삶을 찬송한다. 곧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오늘도 웃시야의 생애를 보고 나의 날들을 생각하게 된다. 저는 영토를 확장하고 가는 곳마다 정복하였다. 국방뿐 아니라 내치에도 힘써 예루살렘을 든든히 하였다. 산과 밭을 개간하고 포도원을 만들기도 하였다(9-15). 곧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일과를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쓰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이를 지속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웃시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이를 두루 경험하였다. 그런데 왜 노년에 이르러 그러했을까?

 

바울이 당부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평소에 견실하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마땅히 어떻게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데서 그 생활은 유지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던히 자신을 돌보고, 죄를 덮고, 성도의 삶을 지속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성경은 인격체로 나를 대하신다. 오늘도 이처럼 말씀으로 먼저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는 것은 그만큼 또한 나로 인격적인 관계로의 하나님을 묵상하게 하려 하신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하여 이처럼 습관을 좇아, 기꺼움으로, 이른 새벽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교회로 나아오게 하셨다. 이러한 주의 돌보심과 지속하게 하심을 감사한다. 그럴 수 있는 적당한 건강과 오늘의 이 한 날도 사랑한다. 하나님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으시다. 나로 이 즐거움, 기쁨의 시간에서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그리할 수 있도록 또한 그만큼의 능력도 더하신다.  

 

예수님도 우리의 보혜사로 계셨지만 성령을 주심으로 또한 보혜사로 오신 주의 영이 나의 연약함을 돌보시고, 허물과 죄악을 덮으시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지속할 수 있도록 함께 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이를 오늘 시편은 찬송하게 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108:1).

 

이는 단순히 그러하다는 느낌으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하여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대하 6:14).” 이는 솔로몬의 고백으로 주가 먼저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자들에게 그리 은혜를 베푸심이었다. 이를 시인은,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2).

 

하고 나의 이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곧 이 땅에서의 시간은 끝이 있을 것인데, 그러므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5-46).”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이 오늘도 나로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게 하셨다. 하게 하셨음으로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아와 말씀을 되뇌고, 새김하며 그 의미를 주와 함께 나누게 하신다. 이에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시국이 어수선하고 사람들이 사는 일에 팍팍하다. 이러할 때에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하면 교만하지 말자. 내 스스로는 주를 바랄 수 없음을 인정하며,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은혜인 것을…….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