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전봉석 2022. 10. 15. 04:30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대하 27:2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시 109:26-27

 

 

남유다 11대 왕 요담(B. C. 747-731)에 대한 이야기다. 25세에 즉위하여 16년을 다스렸다. 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그런데 웃시야와 같이 성전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이는 그 부친의 실수, 제사장의 직무를 함부로 행한 일에 대해 경계를 삼은 것으로 보인다. 저는 국방을 강화하고 암몬을 정복하고 건축을 정비하여 번영을 이뤘다.

 

저는 부친 웃시야의 장점과 단점을 살펴 그 교훈을 삼았다. 즉 우리도 살면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이를 오늘 시편에서 읽으면,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109:26-27).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주가 나로 행하게 하시는 일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 안다. 더러 일련의 이런저런 일들에서 우린 구별해야 한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2).” 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여전하다는 것, 늘 때가 악하여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 그럼에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때가 이르면 알곡과 가라지는 나뉠 것이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곧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27).” 그러므로 나는 어느 쪽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곧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같은 시절을 살면서 저마다 그 사는 방식에 대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뜨끔하면서 나 자신을 불러 세울 수 있는 것, 묵상이란 그런 시간이 되어준다.

 

가끔은 하나님이 왜 그냥 두실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러다 왜 돕지 않으실까? 하는 답답함까지도 인다. 가령 요셉의 경우 저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할 때, 또는 술 맡은 관원장이 저를 잊어버리고 지나는 2년의 생활을 두고… 하나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가? 알 길이 없을 때도 있다. 이에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05:17).

 

그와 같은 가려짐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성급한 마음이 들게도 한다. 가령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는 쉬 눈길을 옮길 수가 없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그러는 동안의 그 세월이 어떠할까?

 

전에 글방에서 유난히 잘 따르며 글도 제법 쓰던 아이가 있었다. 같이 주일도 지키고 예배도 드렸다. 그러다 어느 날 ‘글방’은 가되 ‘교회’로는 나가지 말라는 엄마의 반대에 부딪쳤다. 아이엄마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처녀 때는 믿음이 좋았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전신마비로 태어난 아이를 위해 혼신을 다해 주를 섬기며 기도하였다. 하나 그의 기도에 아무런 응답은 없었고 결국 저는 하나님을 버렸다. 교회를 떠난 저는 둘째 아이가 그렇듯 교회로 나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저런 이유로 이와 같은 경우가 많다.

 

우린 왜 하나님이 모르는 척 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묵묵히 주를 바란다는 것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이와 같은 신앙을 누가 가르쳐서 알았겠나?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45:7).” 요셉은 혼자 버려진 시간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발견한 것이다.

 

곧 우리의 무던함은 믿음의 기본기 같다. 노아에게 그와 같은 무던함이 없었다면 120년이란 그 긴 시간에 여러 시선과 판단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방주를 지을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이 말씀만 의지하여 반평생 이상을 살았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라! 하시는 말씀만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 다윗이 대부분을 광야로 쫓기며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그의 광야의 시간이 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성장하게 한 것일까? … 비로소 누구는 제 2의 인류의 조상이 되고, 누구는 믿음의 조상으로 우리 믿는 자의 아버지가 되고, 누구는 모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기준이 되는…….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일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알 수도 행할 수도 없는 일이다. 스스로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이다. 성령이 없으면 부활도 없고, 성화도 없으며, 은사도 없다. 곧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이 유익은 우리가 임의로 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여 우리에게는 오늘 하루의 성령의 필요하다. 지금 이순간, 매순간의 성령이 필요하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곧 우리는 병 낫기를 바라고, 어떤 일이 잘 되기를 바라기보다 성령을 구해야 한다. 하면 병이 더 악화되어 고통 중에 생이 끝난다 해도, 일이 엉망이 되어 모든 게 망하게 되었다 해도 그래야 그 속의 하나님의 섭리를 알 게 되는 것이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이는 결정적인 것으로,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10).”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린 어떻게 이해하기 어렵다. 설명할 길이 없다.

 

연거푸 닥치는 어려움 속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하신 이 약속의 말씀을 받아낼 수 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나와 함께 하시는 지금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그러므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더러는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럴 때 오늘 시편의 이 비탄을 바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저주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내용이 너무하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하나님께 아뢰고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최종적으로 고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109:26-27).

 

하면서,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4).

 

하고 자신의 원망과 서러움과 저주와 한탄을 주 앞에 토로하는 데 가감이 없다. 거침없는 저의 아룀이 다소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시인은 먼저 주 앞에 고발한다. 저들이 거짓되고 무고히 악으로 선을 갚는 것에 대해 아뢴다(1-5). 그들의 악행을 묵과할 수 없어 하나님 앞에 아주 구체적으로 저들에게 갚아주실 것을, 저주를 간구한다(6-20). 그러므로 자신을 선대하시고 원수에게 저주를 내려 이를 서로 대비되게 해달라고 구한다(21-29). 끝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찬송하고 시를 맺는다(30-31). 어찌 이런 내용이 기도로 올려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다 들 정도이다.

 

이와 상대적으로 욥기서의 욥과 그 친구들의 논박은 누구 말도 옳지 않은 게 없다. 욥은 물론 저의 세 친구들도 듣다보면 모두가 옳은 소리만 한다. 한데 하나님은 이를 나무라셨고, 욥의 중보로 그 친구들의 악함을 용서하셨고 욥의 주장에 반박하셨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 42:7).” 하고 이 문제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8).”

 

오늘 시편의 저주와 욥기의 옳은 주장의 논박을 대비하여 보면 뚜렷한 차이가 보인다. 그것은 주께 아뢰는 것과 사람에게 향하는 것의 차이다. 오늘 시인은 스스로 자신이 그 원수를 상대하지 않았다. 모두 주께 아뢰고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저들에게 갚아두시기를 구하였다. 욥기서의 내용은 서로가 서로를 반박하고 비판하면서 말과 말 사이에 논쟁이 끝이 없다.

 

오늘 시편으로 비춰 참 신앙은 현실을 초월한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109:1).

 

상대적으로 자신이 말 못함을 주가 대신하시기를 바란다. 22-25절에서 시인이 고백하는 것 같이,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나는 또 그들의 비방 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이와 같은 수치와 무능과 연약함을 기꺼이 주 앞에 인정하고 고한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때, 자신이 얼마나 옳은지, 그래도 좀 나은지, 스스로에 대한 수고와 노력을 내세우기 일쑤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일련의 논쟁과 주장에도 자신의 허물과 실수를 스스로 인정하는 법이 없다. 상대를 찌르는 데는 자신이 옳다는 기본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할 때 스스로에 대한 겸손이 곧 무기다. 욥은 아뢰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23:8-9).”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10).”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라 해도, 오직 주만 의지한다는 것은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주를 의뢰하는 것,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곧 하나님은 우리를 더 크게 사용하기 위해 ‘요셉의 시간’과 ‘욥의 과정’을 겪게 하시기도 한다. 보면 또 숨길 수 없는 것이 악인의 거짓말이다.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3-4).

 

저들은 그것을 악으로 여기지 못한다. 이에 대한 경고는 차고 넘친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18, 20-21).” 결국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렘 9:8).”

 

오늘 날 이 시국의 여러 논란을 지켜보며,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대처는 주께 아뢰고 그 공의와 심판을 의뢰하는 일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4).

 

붙들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도, 심지어 저에게 이해를 구하는 일도 모두가 허사다. 다만 ‘나는 기도할 뿐이라.’ 요즘 나는 필리핀 동생의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아뢰고 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새삼 느낀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다들 그러느라 서로의 약점을 잡을 때,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이때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 갚아주신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6).

 

악인은 결국 악인에 의해 당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6-20절까지 하나님이 갚아주시기를 아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 34:11-12).” 욥의 친구 엘리후의 증언이다. 곧 하나님은 악인을 대하실 때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네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7:4).” 곧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28:4).

 

그러할 때 돌려받아야 하는 게 더 많을 것이란 사실은 본인은 은연중에 알고 있지 않을까? 거짓을 말하거나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거나 나름의 논리로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다는 것을, 최소한 자신은 알고 있을 테니까! 참된 회개가 없는 기도는 헛것이다.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7).

 

앞서 시인은 알고 있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66:18).

 

그러니까 남들 다 속여도 자신은 못 속인다. 물론 자신보다 더 자신을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두 말할 것도 없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이에 대해 하나님은 결코 듣지 않으신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어쩌면 모든 피조물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이 아닐까? 하나님이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는 것! 그렇게 주께 아뢰고 고한 후에,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21).

 

가끔 언급하였지만 나는 점점 다행이다 싶은 것이 있는데, 첫째는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라는 사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둘째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도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9).”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렘 14:21).”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이 또 있을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나는 때로 이와 같은 말씀으로 배짱이다. 어디가 아프고, 무슨 일로 힘들고, 염려와 근심이 몰려들 때…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렘 32:18).”

 

결국 고난의 가장 효과적인 대처는 주께 다 맡김이다. 알아서 하세요! 하고 주께 밀어드리는 일,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나는 또 그들의 비방 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23, 25).

 

그러니 저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을 상대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 41:14).” 그러므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하면 우리의 할 일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26-27).

 

주께 맡김으로 더는 휩쓸리지도, 덩달아 저를 상대하지도 않는… ‘나는 다만 기도할 뿐이라.’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3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