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대하 28:1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요담에 이어 아하스(B. C. 731-716년)가 남유다 제 1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저는 20세에 왕이 되어 16년을 통치하였다. 저는 다윗과 같지 않았다는 처음 구절로 모든 평가는 정리된다. 역대 어느 왕보다 악행을 저지른 왕이었다. 후대의 므낫세도 못지않지만 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하였으나 아하스는 그러지 않았다. 저는 온갖 우상숭배와 바알을 섬겼고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방인들의 가증한 제사를 따라 자녀를 제물로 불살라 바쳤다. 산당과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숭배와 악행을 저질렀다. 이에 하나님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공을 받게 하셨다. 아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메섹으로 끌어갔고, 북이스라엘의 베가는 유다에서 12만명을 살육하였다. 여자와 자녀 20만을 포로로 잡아서 사마리아로 끌고 갔다. 이러한 내용은 열왕기상 16:1-6절과 병행한다.
부친 요담은 조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27:2).” 그런데 아하스는 저들 조상과 달리 철저하게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부친 요담 시대의 강성함은 아하스에 의해 파괴되었고, 몇 년 사이에 피폐해졌다. 이는 앞서 백성들은 여전히 부패하였다는 데서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
어떻게 이러한 왕이 웃시야와 요담에 이어 태어날 수 있었을까? 의아할 정도이다. 우리의 평이한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곧 우리의 상식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바울의 설교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모든 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간다. 곧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118:22-23).
무던히 자녀를 주 안에서 잘 키운다고 해도 주가 이를 뜻하지 않으시면, 공식적으로 자녀가 그 부모의 소행을 따라 살지는 않는다. 다음 왕으로 거론될 히스기야는 또한 상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는 자였다. 이처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우리가 주의 하시는 일, 그 생각을 다 알 길이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렇게 해서 지혜자는 명징한 격언으로 이를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면 우리로서는 이 모든 것이 주의 선하심 가운데 행하여지는 일로 알고,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오직 주만을 의뢰하며 살 뿐이다.
본문에서도 보면 우리의 풍요, 넉넉함이 우리로 그릇 행하게 할 소지가 크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어려움이나 고초가 우리로 바른 길을 가게 한다. 다만 악이 악을 끌어들이듯이 오늘 본문 3절의 끔찍한 현상을 보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3-4).” 죄악은 끝 간 데 없이 휘몰아쳐 간다. 앞서 저의 부친 때에 강성함이 저로 이러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27:5-6).”
곧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이할 때 그 결국은 죄악으로 쏠리게 되어 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2:7, 5:8).” 결국은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2:19).” 이와 같은 이사야의 판단은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중한다.
나의 경우도 그 생활이 완만하고 몸도 마음도 적당할 때에는 오히려 ‘다른 짓’을 꾀한다. 오히려 어렵고 힘들 때 주의 이름 앞에 무릎걸음으로 다가간다. 성경은 이를 거듭 경고하셨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그래서 우리 삶에는 필연적으로 광야가 필요한 것이다. “…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6).” 만일 오늘 내가 어려움 중에 있다면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그 의미를 바로 할 수 있겠다.
도식적으로 이를 적용할 수는 없으나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 때가 도리어 안이하고 평온할 때보다 유리하다. 우리가 주를 바라고 온전히 주의 길을 행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을 늘 주목해야 한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5-6).”
결국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 산다는 일은 필연적으로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이다. 해서 지혜자는 누누이 강조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9:10).” 아니면 그 결국은 오늘 본문과 같이 불을 본 듯 뻔하여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 8:9).” 그러니 가장 어리석은 것이 자신을 믿는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7:9).”
나는 이를 자주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본다. 지금 와 생각하면 내 일생의 대부분이 그처럼 그릇된 길로 빠져드는 데 있어 보기 좋게 10년 세월씩 훅훅, 날린 것 같다. 87학번에서 기회를 잃었다가 주의 은혜로 97학번에서 다시 주의 은혜로 신학부를 마치고도 다시 곁길로 가면서 09학번에서야 오늘에 이른 것이다. 스스로도 이를 자주 언급하고 되돌아보는 것은 지금도 언제 또 그와 같을지,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자신하지 않는다. 해서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는 고백 앞에 늘 숙연하여진다. 이는 곁길로 가본 사람은 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그래서도 나는 유독 렘브란트의 유화 <돌아온 탕자>를 자주 들여다보곤 하는가보다. 세상 그 무엇보다 나를 나는 믿지 않는다. 이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뭐라 말해도 유구무언이다. 하면 우리의 살 길은 기도다. 깨어 기도하는 것,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거동이 불편한 장모님을 모시면서 아내의 수고도 모든 가족들의 노고도 있지만 그 가운데 서로의 배움도 크다. 나는 나대로 아내에게 신경 쓰이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고, 어머니가 혹여 불편해할까 하여 마음을 쓰고 행실을 조심한다. 이런저런 불편과 불만은 어찌 보면 유익이다. 그것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실감할 수 있어서이다. 이때의 중심이 늘 기도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요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하스의 행적을 보면서 저로 이와 같이 악의 길로 내몬 것은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9절에도 보면 “그 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그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넘기셨거늘 너희의 노기가 충천하여 살륙하고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압제하여 노예로 삼고자 생각하는도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9-10).” 곧 그때마다 말씀을 전하여 주의 뜻을 알리는 주의 종이 있었다. 그때 나도 저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저들의 일에 대하여 부정적인 마음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곁에 있던 주의 사람들에 대해 나의 강퍅했던 마음은 이를 적대시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은 그 반대 입장에 서서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두고 저에게 주의 선하심을 나타내야 할 때 그 마음이 완고함에 대하여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니 이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곧 기도와 말씀이 바르지 못할 때 우리의 믿음은 그 신앙적인 배경과 달리 어그러진 길로 가게 하기 일쑤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0-11).”
이를 오늘 시편으로 다시 묵상하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110:1).
본 시의 저자인 다윗도 마찬가지고 여기서 내포하는 ‘내 주’는 그리스도 예수를 의미하는데,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마 22:44).” 곧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이를 이제 우리도 알고 고백하기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곧 세상은 늘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세상은 결코 또 우리를 능히 멸망시킬 수는 없다. 즉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슥 10:5).”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이에,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2-3).
결코 우리의 완고함이 우리를 짓눌러 압사시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신 것 같이, 나 같은 자를 돌이켜 주 앞에 굴복시키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 이를 위하여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그러므로 돌이킬 자로 돌이키신다. 다시 세우실 자로 다시 세우신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9-20).” 곧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우리는 이제 기꺼이 주의 길을 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4).
곧 우리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구원함을 받을 수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반드시 하나님의 선언은 이루어진다.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히 7:17, 21).” 이를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111:7-8).
곧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그러므로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5-7).
이 땅의 결국이 알려졌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7-8).” 때가 아무리 긴 것 같아도 조만간의 일이다. 그 일의 결국을 두고 주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주를 바람으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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