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고 왕의 이름으로 큰 상을 주니라
에스더 2:17-18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편 140:12-13
왕이 왕후 와스디를 폐위한 후 새로이 왕후를 세우는데, 오늘 본문의 첫 어절은 ‘그 이후’이다. 이는 16절에 저가 재위 7년에 뽑협으니까, 와스디가 폐위 되고 4년이 지난 후에 에스더가 꼽혔다. 그 사이 재위 5년인 B. C. 481년에 그리스 원정을 단행하였고, 479년에 또 한 차례 이루어졌다. 두 번의 전쟁은 3, 4차 페르시아 전쟁으로 그 유명한 살라미 해전과 미칼레 전투가 있었다. 이후 페르시아는 쇠락하고 그리스는 점점 강성하여졌다. 에스더가 왕후에 오른 것은 이와 같은 3, 4차 전쟁을 치른 뒤였다. 아하수에로는 홀로였고 이에 새 왕후 간택령이 내려졌다.
오늘 말씀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신부로 삼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상상한다. 곧 역사적인 배경으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일련의 결과를 두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온 우주적인 역사가 서로 맞물려 행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오늘 눈에 들어오는 본문으로,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고 왕의 이름으로 큰 상을 주니라(에 2:17-18).”
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주의 은혜를 입는 대목을 연상하게 된다. 어찌 됐든 우리 안의 이런저런 갈등도 주 앞에 겸손할 수 있게 한다. 겸손은 개념이나 지식이 아니라 느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이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 느끼고 그리 믿겨지는 일, 그리하여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 이에 그럴 수 있는 사람과 이내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하나님은 절대자, 만유의 주가 되신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그러니 어떻게 내가, 나 같은 자가 이처럼 주 앞에 은혜를 입었는지… 심지어 자녀로, 신부로 나를 삼으시는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 나는 주의 기쁨이 되었다는 은혜를 어찌 말로다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한 느낌으로 우린 결코 예수님처럼 될 수 없으나 예수님처럼 되려는 노력으로 그가 받으신 것 이상을 바라지 않게 된다. 저는 부와 명예와 이 땅에서의 영화를 바라시지 않은 것처럼,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곧 나는 그의 발등상의 들메끈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 내게 오늘 이 귀한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숱한 시간,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이 일을 이루기까지 역사하였던가?
그러한 예수를 우리도 닮고자 하나,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권리나 주장, 생각이나 목적을 내세우며 그 권리주장을 예수님 이상으로 하지 않으려 해야 한다.
오늘 본문 1절에도 보면 이런저런 전쟁 후에 와스디를 그리워하는 듯한 아하수에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이는 순간의 분노 때문이었다. 분노는 모든 것을 앗아간다. 모든 감정을 휩쓴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어 분노보다 냉혹한 감정은 없다.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도 그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분노의 결과다. 처음 사람의 처음 후손 가인의 분노를 하나님은 미리 아셨다. 이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한데 분노란 감정은 모든 감정을 휩쓸어버린다. 이해나 용서나 자애는 분노 앞에 힘이 없다.
살면서 분을 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지혜자 솔로몬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 14:29).” 곧 화가 많은 것은 그 안에 아직도 주 앞에 풀어내지 못한 억하심정-마음 속 깊이 맺힌 마음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를 주 앞에 풀어놓으면 기도가 되지만 남 앞에 풀어놓으면 화가 된다. 분노가 일면 모든 감정을 빨아들인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 37:8).
오늘 첫 구절에 아하수에로는 전쟁을 두 차례 치른 뒤 심신이 피로하던 때에 자신이 왕후 와스디에게 그리 분노하여 저를 폐위시킨 것을 돌이키며 후회하고 있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며 공정한 대접과 상식을 요구하며 화를 내지 않으셨다. 그 예수님이 받지 못한 공정함을 우리가 얻고자 하여 분쟁하고 다투는 일은 어리석다. 오히려 예수님은 다툼에서 꼭 이겨야 한다고 가르치신 적 없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며 이를 입증하는 일을 권하시지 않았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야고보 사도는 한 술 더 떠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하여 우리가 받은 바, 은혜에 대한 느낌은 이와 같이 우리 마음 속의 마음 곧 억하심정을 누그러뜨리고 없이한다. 그렇게 자신이 이기려고 기를 쓰고 다투는 일에 화를 내지 않게 한다. 은혜를 받았다는 느낌은 점점 자라가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6).”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은혜를 받은 느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5).
이에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10).” 우리가 그렇지 못한 자를 위하여 그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는 이유다. 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곧 은혜 받은 자는 진리를 안다. 점점 더 알아가고 알고자 한다. 왜? 진리가 곧 자유함을 주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자꾸 일어나는 어떤 다툼과 어떤 일에서 거리를 둔다. 때론 바보처럼 군다고 핀잔을 받더라도 그리한다. 굳이 그런 일(!)로 싸워 이겨봐야 남는 것은 씩씩거리며 분한 마음뿐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점점 더, 매일 매순간 더 많은 은혜를 갈구하게 된다. 그것으로 믿고 숨 쉬고 산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를 알게 된 것도 은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를 믿는 것도 은혜, 구원을 받는 것도 은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어떤 소원을 두어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게 하는 것도 은혜 곧 하나님의 선물이었으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그러므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중에 으뜸은 화다. 분노는 모든 감정을 사른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4).” 이 또한 은혜 아니면 할 수가 없음을…….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한데 이를 망치는 것은 자기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는 화 때문이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6).” 허탄한 자랑이 자기주장과 자기 권리에 따른 상한 욕구다. 자존심이라도 하는데 순간 자존심이 상하면 이성을 잃기 쉽고, 이성을 잃으면 화가 먼저 올라와 분을 내게 돼 있다. 한데 우리가 주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니! 이를 야고보 사도는 어찌 알았을까?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은혜란 참으로 기이하고 기괴하기까지 하여 내 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어떤 간절함으로 내 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될 줄이야… 그리하여 지혜자의 같은 말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주를 경외함으로 지혜의 훈계를 들을 줄 알고, 이에 따른 겸손이 우리로 존귀하게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18:12).” 본래 우리 마음이란 게 억하심정이 가득하여서 그 마음, 내가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권리주장이 겸손의 반대 교만함의 선봉이 될 줄이야! 이를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겸손을 길잡이로 삼아야 존귀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
나는 오늘 본문에서 이 두 가지, 하나는 분노와 그에 따른 후회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것(!)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묵상하게 된다. 곧 에스더가 에스더의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함으로 은혜 받은 것을 잃지 않고 이를 더욱 확장하여 재생산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4-5).” 그러므로 오늘 내 곁의, 특히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동기들을 중심으로 볼 때 보내시는 이와 이에 따르는 자와 이내 따르지 않는 자로 나뉘는 것을 본다. 그 단순한 차이는 겸손이었다.
누군 여전히 자기 생각으로 자기 권리를 우선하는 것으로 미적거리며 이내 시간을 다 축내는 사람과 누구는 살거나 죽거나, 이루거나 못하거나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 이 둘의 차이는 하나였다. 그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도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할 때 화가 또 분노다 저의 속 깊은 마음을 들추어 화를 폭발시켜 분노함으로 모든 감정과 이성과 상식을 사라버린다. 하물며 계절이 바뀌면서 낙엽이 떨어지고 바람이 부는 것도 모든 게 은혜인 것을…. 오늘 에스더가 왕은 물론 주변의 모든 이에게 은혜를 받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오늘 시편으로 묵상하면,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140:1).
곧 주의 은혜 아니면 살 수가 있나? 이를 알면 그 절박함으로 우린 기도를 한다. ‘나를 건지소서.’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에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아니면 우리를 상대하려는 자들과 우리가 어찌 다 일일이 견주며 살 수 있겠나?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35-37).
아니면? 내 자존심이 또는 주장과 권리가 나를 지켜주던가? 일찍이 나는 번번이 실패했다. 내가 당한 모욕을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아뢰지 않았더라면,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듯 따지고 묻고 심지어 토라져서 심드렁하게 굴며 주를 외면하고 살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끊임이 없었고 외면하지 않으셨다. 마치 다윗과 같이 주께 일일이 고하고 아뢰고 도움을 구할 때 신기하게도 주의 은혜는 더하시고 더하신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셀라)
(140:2-5).
이렇듯 우리가 주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소릴 하고 어떤 도움을 구할 것인가? 사람은 다 애굽과 같이 상한 갈대라. 의지하고 짚었다가 도리어 손만 찔리고 그 상처가 더 아플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스스로 머리 쓰면서 알아서 하겠다고 고집부리다 더는 후회조차 할 시간도 잃는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그러니 부디 함부로 굴지 말자.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잠 26:20-21).”
화를 참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도 없다. 설령 당장은 해결된 것 같지만 더 큰 화를 유발하게 될 뿐이다. 곧 다 지나간다. 그런 뒤에는,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신 32:35).” 후회도 할 수 있을 때가 은혜다. 주가 우릴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주의 은혜는 무한하시다.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마시며
그의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스스로 높일까 하나이다 (셀라)
나를 에워싸는 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들 때에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
(6-11).
오늘 시를 한 행마다 내가 아뢰고 싶은 일과 마음을 되새기며 읽는다. 마치 부모에게 일러바치는 아이처럼 누구에게 말한들 소용없는 일들을 두고, 나의 가장 큰 은혜는 어릴 때부터 주를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이르고 또 호소하고 도와주세요! 하고 주께 구하였던 것 같다. 이것도 기도가 되겠나? 싶은 것까지도… 주께 일러바치듯 마주알고주알 때론 누굴 욕하기도 하고 때론 어떤 일의 억울함을 아뢰기도 하면서…. 그런데 주가 이를 권하셨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어떤 근사한 말,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기도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리하는 것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아, 이 놀라운 진리!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고 날 위해 내어주셨는데 하물며 나의 어줍은 소리라도 이를 듣지 않으실까?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곧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사 13:11-12).” 우리의 아룀도 신비로운 일이지만 거만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아뢰지 않는다! 그러느니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나선다. 그럼 뭐, 별 수 없지. 그러나,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은 그러하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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