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전봉석 2022. 11. 19. 05:11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에스더 3:4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시편 141:8-9


하만 장군의 유대인 멸살 음모가 드러난다. 그 이유는 사소하여서 자신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데서 시각되었다. 모르드개는 어떤 의도에 의해 이를 자처한 셈이다. 더욱이 자신의 출신을 밝힘으로 유대인들이 모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알려 이를 피할 수 있게 한 사건 이후 아하수에로는 하만의 지위를 2인자 자리에 앉힌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무릎을 꿇어 절하는 행위는 신적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경의와 경외의 대상은 하나님 외에 없다. 그러니 모르드개는 신앙의 절개를 지킨 셈이고, 자신의 정체성 곧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자기 백성들에게 그와 같은 민족성을 알게 하려는 것과 페르시아 제국 내 여러 소수 민족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그러한 행위로나마 오히려 하나 됨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보면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 원수는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이를 회피하느냐 대면하여 굽히지 않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러한 행동이 다소 무모하고 의미 없어 보인다. 그러나 훗날 예수님의 설교에서처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막 13:22).” 어차피 거짓과의 직면은 감수해야 한다. 어그러진 말이니 시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29-30).”

하여 오늘도 우린 하만과 같은 이들을 상대하는데 있어 모르드개와 같은 절개와 그 신앙의 확신이 필요하다. 곧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왜냐하면 이는 당시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이나 그 역사의 소용돌이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마다 거듭되고 되풀이 되는 일이다. 더욱이 그들이 점점 더 잘되고 모든 게 성공적인 기류일 때, 때가 가까움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욥 20:15).” 곧 이 땅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지나간다. 저들이 비록 무성한 듯하나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시 37:35-36).

당장은 그들의 모습이 부러울 정도로 화려하고 모든 게 다 잘되는 것 같다 해도, 하여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2-3).

부럽기도 하고 때론 내 길이 맞나? 싶은 회의도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2).

그럼 이를 바로 알려면,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6-17).

저 일시적이고 한순간일 뿐인 평안과 성공이 결코 부러워할 것이 아닌 것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0).

그 결말을 안다면 우린 더 이상 굽실거릴 것도 혹시나 하고 기대할 것도 아니다. 저들은 우리가 무릎 꿇을 대상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신앙의 절개는 만유의 주를 앎이지 세상을 좀 더 평안히 살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곧 나의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데 분명한 입장이 필요하다. 우린 막연히 누군가를 향한 신앙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로 인해 곧 무언가로 인해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찬양하는 것이다.’ 같은 의미 같지만 전혀 다른 소리다. 우리 의지로는 그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가끔 교회 안에서 유난히 열심인 사람을 본다. 저가 주의 은혜로 인한 것이면 겸손과 은혜가 나타난다. 하지만 자기 의지나 신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면 누가 알아주고, 이를 따라주기를 바란다. 즉 강요하고 요구한다. 스스로 애써 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요구다. 그러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곧 자기의지로 하려 하는 사람은 남의 이목과 평가에 연연한다. 알아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화가 난다. 그러나 주에 의해 하는 사람은 은혜로 인하여 겸손하고 오히려 누가 알까 하여 조심스럽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겸손도 은혜다. 자의적으로 되는 게 아니다. 되게 하시는 이로 그리 되는 것이어서 내세울 게 없다. 이는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43:6-7).” 전적으로 우리의 의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다. 하만 앞에 모르드개가 보인 이와 같은 절개는 개인의 신념이나 확신에 의한 치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그 본성의 결과이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9-11).

이사야서의 이와 같은 말씀을 찾아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리 안에도 모르드개와 같은 올곧음이 있어서이다. 저는 신앙의 지조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는 어린 다니엘도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8-9).” 곧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이와 같은 신앙의 공식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지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우리의 겸손과 순종으로였다. 고로 신앙을 올곧게 가지고 살려면, 오늘 본문 4절에서처럼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집요함이 우리에겐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르시길,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말미암아’ 곧 ‘인하여’ 우린 우리 의지인 듯 의지가 아닌 믿음으로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전 4:12-14).”

성경은 이처럼 일관되게 우리의 의지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의지, 그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섭리를 알린다. 이는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그런 이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곧 오늘 우리의 신앙은 그에 의해, 그에 의한, 그가 행하시는 일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그렇다면 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것으로 하나님을 기쁨을 감추지 못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로 인하여 만물이 만들어졌고 사람을 지으셨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아끼시기를 독생자도 내어주시기까지 하시는 그 사랑으로다.

이와 같은 시점으로 오늘 시편을 보면, 왜 우리가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도가 먼저 나오고 하나님을 부르게 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141:1-2).

곧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한, 하나님에 의한 지극히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일이다. 나의 의지나 어떤 의무감으로가 아니다. 절박함에서 주를 찾는 일이 우리로서는 가장 쉬운 일인데 하나님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 한다 해도 이는 ‘인한 것’이 아니라 ‘향한 것’이다. 이 차이는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문제 해결이 목적이고 당면한 현실의 절박함이 우선이면 굳이 그가 하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그런 이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점을 보고 누가 사주나 어떤 대안에 솔깃 한다. 왜냐하면 저의 신앙은 혹은 사명감은 하나님으로 인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 이는 우선하는 목적이 있어서이다. 병 고침, 어려운 사업 부진,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소원 등 자기 안의 필요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라… 이는 수많은 군중이 예수를 찾았고 말씀 앞에 앉았으나 결국은 십자가에 달게 한 이들이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어떤 다른 이유도 목적도 없다. 그저 하나님에 의한 신앙은 오늘 모르드개와 같이 무모하여 스스로 궁지에 몰리게도 하는데,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이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그러할 때에,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3-4).

우리는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낀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도 간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 고하기를 내 입의 파수꾼을 바란다. 무엇보다 몸이 앞서면 입이 먼저 허튼소리로 생채기를 내며 상대를 공격하고 자신을 헐뜯는다. 지혜자는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9:20).” 차라리 오죽하면 미련한 자에게 희망을 둘까? 말이 앞서는 사람치고 그 마음이 오롯이 주를 향하기란 어렵다. 그래서들 강조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7-8).” 툭, 튀어나오는 말을 제어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이를 지키려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이에,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119:36).

우리는 이를 앎으로 주께 빈다. 그러할 때,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5).

여기서 의인이 나를 친다함은 바른 말을 해주는 때인데, 점점 더 세대는 이를 듣는 귀가 닫히고 깨달을 수 있는 신경이 마비되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친하고 믿는 사람이라 해도 뭐라 말하기 쉽지 않다, 실은 누구의 말도 듣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저 나를 두둔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호의로 대하는 사람이어야 ‘좋은 사이’가 유지된다. 할 때 오늘 시편은 이를 위해 항상 기도한다고 한다. 더욱이 ‘그들의 재난 중에도’ 말이다. 가령 의인이 곧 함께 믿음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뭐라 이르고 자신은 오히려 더 어려움에 처하는 것을 볼 때 이를 판단하거나 비난하기보다 기도한다는 것이다. 말이 쉽지 열에 아홉은 실망을 했네, 마네, 저 때문에 교회를 옮기네, 안 다니네, 하기 일쑤다. 그럴 때 보면 악인에게는 관대하면서 의인에게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이에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잠 15:5).” 곧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25:12).”

이를 새겨듣을 수 있는 게 실력이다. 그럴 때 나타나는 놀라운 일은,

그들의 재판관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
(6-7).

설령 저들이 곧 내게 충고한 의인이 더 큰 어려움에 곤두박질하는 것을 볼 때 이를 두고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 가령 꼴 좋다 하는 식으로 억하심정이 들 때 저가 아니라 내가 지옥 입구에서 부서지는 꼴이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저도 나도 우리를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결국 우린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본다. 하면,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8-10).

악인으로 올무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한 걸음 더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잠 29: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