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욥기 11:7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시편 9:1
이번에는 나아마 사람 소발의 말이다. 저의 말은 가만히 듣고 있으면 가정문으로 되어 있다. ‘~하면’ 하는 식으로 그 논조는 전통적이고 교리적이다. 인습에 의한 변론으로 독선적이기까지 하다. 먼저 저의 지적은 욥이 말이 많다는 것이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2).” 스스로 정결과 순결을 주장한다고 하나 말이 많아 그것은 자랑일 뿐이라고 이어간다. 이는 두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의 말에 대한 변론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이것으로 욥이 어리석고 죄인인 것을 강조한다.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3-4).”
하긴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이와 같이 소발의 지적은 격언과 같아서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 5:3).” 뭐라 반박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욥의 그러한 태도를 소발로서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대놓고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5-6).” 그러니 그 말이 옳은 것이어서 아니라 하기 어렵다.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셀라)
(시 140:3).
그르다 할 수 없으나 옳은 게 아닌 것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쉽지 않다. 말이란 게 감정을 자극하는 법이어서, 감정이란 마치 카펫 밑으로 치워 둔 온갖 케케묵은 감정들이어서 예전 일까지 들추기 십상이다. 했던 말 또 하기 마련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옛날 버릇까지 터져나온다. 말이란 게 참 그러하여서 스스로도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봇물 터진 듯하다. 하여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4:2).”
그러니 소발의 지적처럼 욥이 말이 많다는 것은 그럴 만도 하다. 소발의 말처럼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4).” 하는 지적은 앞서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하였던 욥의 말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한데 이 말은 자신을 의롭다 한 게 아니라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과 같이 말의 품격은 인격과 성품의 가늠자이다. 어떤 추임새나 말버릇이 있는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의 아비라고 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우리의 말 실수가 실은 괜한 데서 오는 게 아니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34:13).
하여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잠 17:4).” 이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와 같아서 보면 악의적인 말을 하는 사람치고 공격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고 왜곡되고 편향된 사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들을 보면 교과서 같고,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충은 감이 온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9).” 참으로 교묘하게 말과 말 사이를 거짓으로 모면하는 사람들이 잘도 산다.
이사야는 저들이 화 있을진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5:18-19).” 그 한 마디는 그럴 수 있다 하겠다는데 그 한 올 한 올이 엮여 수레를 끌 정도이니, 그럴 술수가들이 정치가 되고 세를 확장하여 자신의 주장에 자신이 도취되어 산다.
소발이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들먹거리며 욥을 공격하는 말이 기가 막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7).” 저의 말은 그르지 않으나 옳지가 않은 것은 머리로는 아는데 그 쓰임이 찌르는 데 쓰인다.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12).” 말이 나가다 나가지 말아야 할 말까지 나가는 게 적발과 오발의 차이는 애매하다.
우린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말씀을 의지하고 이를 기준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똑같은 것도 누구에겐 미련하고 누구에겐 능력이 된다. 그러므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그러니 우리가 누구라도 자랑할 게 없다.
주로 누구와의 통화에서 저의 늘 같은 소리에 뭐라 할 말이 없다. 덩달아 같은 말만 되뇌는 꼴이다. 더욱이 아이 일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라 문제가 되고 있다. 이제 시작하다, 하는 말을 수도 없이 하였는데 ‘별 수 없이’ 저가 안달이다. 그렇지, 엄마로서 별 수 없고 아이가 다소 부족하니까 별 수 없겠으나, 별 수 없다는 늪에 발을 들이면 헤어 나올 방도가 없다. 주께 맡긴다고 할 때 그것까지는 못하겠다. 3학년이 되었는데도 학교에 데려다 주고, 하나부터 열까지 눈길을 뗄 수 없고 손길이 머무는데 그야말로 별 수 있겠나? 애가 우상이라!
원숭이 사냥이 진짜 그러한지 모르겠는데, 작은 구멍에 바나나를 넣으면 덫이다. 손을 간신히 넣어 바나나를 쥐면 끝이다. 사냥꾼이 와도 잡은 것을 놓지 못하겠으니 손을 뺄 수가 없고 손을 뺄 수 없으니까 바동거리다 잡힌다. 정말 그럴까? 싶을 정도로 미련한데 우리 삶이 그러하지 않던가? 잡은 건 어쩔 수 없고 새로운 것은 못 잡겠으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어 발버둥거리는 것이 영락없이 덫에 걸린 원숭이 꼴이다. 주께 맡긴다는 일, 쥔 걸 놓는 게 그렇게 안 된다.
하도 그런 게 아니라고 해서 결국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거 아냐? 하고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놓고는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다른가? 별 수 없는 것이 저만 그러한가? 내 말이 소발과 다를 게 없었다는 생각이 훅, 든다 갑자기.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욥 11:13-14).” 말해놓고 보니 그게 내 꼴이었다. 우린 어쩔 수가 없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5).” 우리 때문에 예수 재림이 늦춰지고 있다!
복종은 오랜 연마의 숙련된 신앙이다. 저절로 되지 않는다. 이는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4-16).” 참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그럼에도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단 5:23).” 어렵다, 너무 어려워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 안주할 때가 많다. 고착된 감정을 풀어 제쳐야 한다. 어제에 양분된 감정을 일심으로 주 앞에 향하려 묵상하였던 마음인데,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9:1).
오늘 시편은 한 단계 더, 전심(全心)을 요구하신다. 양분된 마음에서 일심(一心)으로 나아가면 비로소 전심으로 주를 바랄 수 있을까? 끝내 알지 못하는 마음으로는 불의할 뿐이다.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습 3:5).” 수치는 그래서 자신만 못 느낀다. 부끄러움을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그러니 나의 허물과 실수를 주께 아뢰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롬 3:5).” 곧 나의 부끄러움까지도 기꺼이 주를 위해 쓴다는 것.
내가 후회하고 또 아무에게나 말하기 쉽지 않은 일을 누구에게 말하는 까닭은 저로 이를 듣고 자신의 오늘에서 그 문제의 단순하고 모자란 죄성을 알게 하려 함인데… 듣는 귀도 필요하고 말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성령이 열어주지 않으시면 모든 게 허사라. 그저 넋두리나 늘어놓자고 우리 속의 말을 꺼내는 일은 수치를 자초하는 일이다. 우리가 서로 의논할 일이 아니다. 주께 아뢰지 못해서다. 맡길 수가 없다. 그러니 자신이 짊어진다. 그래놓고는 죽겠다. 곤죽이 되어 말끝마다 죽겠다. 그 삶이 고달프고 안 됐다. 잡은 걸 놔! 하고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 맡긴다지만 그게 또… 미덥지가 않은 것이다. 그래놓고는 이제와 다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는… 나는 그래서도 가끔 우리 부모가 대단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남매를 주께 맡기지 않으셨다면 저들은 결코 사역을 전심으로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어 쓰시든지 아니면 일찍 거둬 가시든지… 가끔 어머니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그리 말할 때는 그러기까지 그 속은 오죽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이제 이 나이쯤 되어서는 할 수 있다. 어릴 적 함께 옮겨 다녀야 했던 목회지에 대해 회상하면 참, 그러고 어찌 살았나 싶다. 결단의 문제가 복종으로 이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맡길 것인지 맡을 것인지, 자신들이 짊어질 몫이다. 하여 오늘 시편은 첫 두 구절로 참된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 같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9:1-2).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복종으로 가는 첫 발은 전심(全心)으로 주를 감사히 여기는 것이었다. 그러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를 찬미할 수 있다. 그러려면 말씀으로 엎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감사가 없이는 맡길 수도 없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보면 있는 것에 감사할 줄을 모른다. 사지 멀쩡하고, 어찌됐든 자기명의의 지상의 집 한 채 쥐고 목회를 하네, 마네 염려하는 목사가 몇이나 될까? 모르겠다, 실은 다들 그 정도 해놓고 살면서도 죽는 소릴 하는 건지… 당장 이 엄동설한에 어디 반지하라도 등 대고 누일 곳 없이도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두고 씨름하는 목회자가 내 곁에 여럿이라, 나는 누구의 이런저런 걱정이 배부른 소리만 같다.
오늘 시인은,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7-8).
하는 데서 가슴이 철렁하다. 나는 어떠한가 하고, 전화를 끊고 괜한 말을 했나, 싶은데 또 나중에 다시 들으면 그 소리라… 손에 쥔 걸 놓고 주를 따르기란 그리도 불가능한 일인가보다. 예수 앞에 와 주를 따르겠노라 했던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의 행위대로 그의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대하 6:23).”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3).
주께 아뢰고 고하며 맡기고 가야 할 길,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4).
아니면 우린 모두 전멸할 것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73:18-19).
복종으로 손에 쥔 걸 놓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나?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19-20).
곧 우리의 잘 됨은 저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한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24).”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전심으로 복종할 때에 순종에 이르는 일이어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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