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욥기 12:5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시편 10:1, 12
부조리한 삶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여러 가지다. 가까운 친구들의 독설과 비난으로 인하여(1-6), 그에 반하여 자신이 아는 하나님의 지식을 나타냄으로 방어한다(7-25). 그 안에 풍자와 해학이 있고 경멸과 조롱이 있다.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2).” 하고 이어지는 욥의 반론은 고난당하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하는 친구들에게 변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조리함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 평안히 잘 사는 현실이 아닌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6).”
우리가 누구를 대할 때 특히 저의 아픔을 두고 이를 어떤 목적화해서는 안 된다. 욥은 결국 친구들의 그러한 편향성에 냉소적으로 응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그러할 때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 슬픔을 슬픔으로만 함께 하고 더는 이를 정치화해서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해석해서도 안 된다. 다만 “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설령 자신이 무엇을 안다 할 때 그 앎을 오히려 두려워할 줄 알아야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2-3).” 하나님이 아시는데 다른 누구의 이해나 권면을 더 필요로 할까. 우리 슬픔 너머에는 기쁨이 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5).
곧 우리의 감정이란 게 그때마다 달라지는 것이어서 우린 다만 헤아릴 뿐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하나님을 인정하는 곳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이 모두를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한 마음으로 양분되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이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모든 것을 인정하는 데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는 진행된다. 하여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전 7:15-16).” 곧 ‘지나치게’ 다시 말해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넘보는 모든 것은 하나님보다 자신과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이겠다. 우리의 슬픔 뒤에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하니,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0-21).” 남의 일에 왈가왈부하는 사람치고 그 삶이 진실 된 자를 본 적이 없다. 본디 자신이 꿀리는 부분에서 사람은 큰 소리를 낸다. 나는 가끔 사회적인 어떤 참사를 겪을 때면 이를 쟁론화하여 정치화하는 사람들을 환멸한다. 함부로 예단하고 속단하여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오늘 친구들의 시각은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란 소린데,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30:1).” 욥의 이러한 풍자가 저들의 공격이 더 고통스러운 데 대한 방어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의인의 간구에 더 밀접하시다는 사실은 성경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또한 그러할 때 의인의 구함에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이를 의롭다 하신 이가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여기서 천국의 실체는 이 모든 일의 우선에서 영원하였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3-4).” 나는 성경의 어느 부분보다 이 부분에서 놀라운 새 힘을 얻곤 한다. 모든 게 다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그럼 오늘 우리의 슬픔의 고난도 역경도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5-6).” 그 이유를 우리로 알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은 그 전에도 오늘도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오직 주의 사랑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되었다. 좋고 좋은 그곳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누리시길 바라시는 사랑이 기초가 되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오늘 우리는 이 현세에서 간간히 맛보아 알 수 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이를 알 때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아,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고난과 역경은 잠시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이를 보고 속단하여 조롱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 17:5).” 어쩌면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그 주범들이 정치화하여 진영논리 가운데 가두어버린다. 슬픔을 통제하는 모든 세력은 어떠하든지 악하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본래 악인들의 삶이란 부조리의 연속이다. 오늘 욥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6).” 하고 이를 결국 하나님의 역사 안에 둔다. 마치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와 조롱마저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삼하 16:10).” 이것까지도 주의 놀라운 섭리와 의로우신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여겼다. 곧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73:12).
부조리에 대해서는 주의 의도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조적인 시각으로 그 가운데서 주의 역사를 본다는 일은 놀랍다. 욥은 오늘 이를 시적으로 해학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7).” 이어지는 11절까지의 내용이 시적이기까지하다. 곧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스승으로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1-4).
어떤 일, 우리가 영적으로 암울하고 어려움 가운데 놓일 때, 가만히 자연의 순리를 보며 그 교훈을 얻는 것도 지혜이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잠 30:24-28).” 곧 우리에게 이를 보고 듣고 느끼며 알게 하신 이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도 이를 들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6-28).” 자연을 빗대어 우리의 염려를 단속하셨다.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를 알기 위하여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를 단순화해도 우리로 주의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에서 ‘자신에게 선포하기보다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우리의 불행은 시작된다.’ 그러므로 욥의 말처럼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13-14).” 그뿐인가?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15-25).” 모든 게 다 주의 뜻 안에서! 하여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그러므로 모든 게 다 때가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이러한 때에 우리가 힘에 겨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0:1)
주께 묻는 것, 곧 그 모든 일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25:5).
이 놀라운 경험을,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37:39).
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우리가 주를 바라는 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이와 같은 언약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다. 주가 나를 어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를 묵상하며,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2:1).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55:1).
이처럼 우리보다 막강한 권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10:2-3).
저들을 주께 부탁하는 사이, 이는 주의 약속이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 말씀을 나와의 말씀으로 받을 때,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2).
우린 주께 우리 자신을 의탁한다. 모든 게 다 부패한 땅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그러할 때에,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14).
주가 나를 책임지신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8).” 그 주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1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6).
이를 우리는 볼 것이다. 반드시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0: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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