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욥기 13:15-16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편 11:3
나아마 사람 소발의 말 뒤에 욥의 변론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논쟁이 소모적인 것을 피력한다(1-2). 하여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3).” 하고 자신은 직접 주께 고하기를 구한다. 친구들의 말이 무가치함을 지적하고(4-6),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언급한다(7-12). 앞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변호할 수 없음을 밝힌 적이 있다(9:3, 14). 그럼에도 오늘 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죄 변론을 감수한다(13-16). 하나님과의 변론이 오히려 자신의 진심을 밝힐 수 있다고 확신한다(17-19).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저가 반복하는 말이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안다’는 것이다(12:3).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13:2).” 이는 자신도 안다, 옳다는 식의 대꾸가 아니라 서로의 실수를 일깨우기 위한 것 같다. 친구들의 실수 곧 회개만 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텐데 왜 회개하지 않느냐? 하는 주장에 대해 바로잡기를 원하는 것이다. 같은 말이 반복된다는 것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효과보다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는 데 있다. 지혜자는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 29:1).” 이는 상대적으로 자신도 그러함을 인정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곧 저마다의 상처 받은 심령을 안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형국이다. 가끔 누구와의 대화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케케묵은 감정들이 의외로 지배적이란 것이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싶은 감정을 토로하며 오늘을 변명하듯 말한다. 이런 우리 자신을 향해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 12:2).” 같이 어울려 사느라 같이 들 물든 것인지… 늙으신 장모와 같이 살면서 가끔 저의 옛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런 걸 다 아직도 마음에 품고 어찌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나는 주의 은혜에 저절로 감사가 나오는 것은 글쓰기다. 어릴 적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험난한 시절을 겪으며 남다른 모욕과 굴욕과 모멸감과 열패감으로 여전히 고약한 억하심정이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기억들이 오히려 ‘남다른 추억’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이다. 한참 사춘기 중1 때 처음 자살시도가 미수로 그치고 심한 우울감에 빠져들 때 하나님은 ‘교회누나’를 옆에 두셨다. 나이는 동갑이고 학년은 두 학년이 높은, 다소 애매한 사이로 시작하였는데 그 애는 유독 글쓰기를 좋아했다. 학생부 마니또(당시에는 ‘천사게임’이라 하였는데)의 대상이 나였고, 나는 생전 처음 내 앞으로 오는 편지들에 질식할 정도였다. 세밀히 나를 관찰하여 쓴 글에서부터 하나의 수채화 같은 동네 곳곳을 소개하는 글에서, 자신의 마음 아픈 가정사까지… 그 애의 거침없는 세계에 나는 두 달 동안 푹 빠져 살았다.
누구였는지 몰랐을 때 받은 편지들이라 상상은 실제보다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밝힌 후 그 애는 맹랑하게도 답장을 요구했다. 그동안 저의 세계에 빠져 있어서였을까? 나도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는데, 당시 나로서는 철자법도 제대로 모르는 지진아에 특수아동으로 분류된 아이였다. 그 애의 재촉에 떠듬거리고 쓰게 된 편지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들어가보지 못한 나의 이야기 속을 밝혀주었다. 소위 첫사랑이라 수 있는 그 애와의 3년 동안의 편지쓰기는 그 분량으로만 쳐도 수 천 개의 은하계를 구성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그 일 전에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는 유독 설교내용을 필기하게 하였고, 이를 가끔 검사하고 야단을 치기도 하였다. 주일 날 아버지의 설교는 수요예배로 이어졌고 각 구역예배와 주일학교 교재로 쓰였는데 이는 각각의 직분자들의 묵상이었다.
여하튼 오늘도 나의 이와 같은 묵상글쓰기는 그 일환으로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나는 글쓰기를 사랑하고 누구에게라도 권한다. 글은 생각의 집을 지어주는 것으로 막연한 감정에 적합한 옷을 입혀주는 것과 같다. 그렇게 나의 슬픔이 또는 노여움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또한 그것이 언어로 명명되면서 그 감정의 실체가 규정될 때는 더 이상 모호한 괴롭힘은 없다. 어떤 감정에 멋모르고 시달리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정에 따른 왜곡된 기억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자기분석글쓰기’라 명명한 일기나 편지, 묵상글을 쓸 것을 권한다.
이를 오늘 욥은 가감 없이 주장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15-16).” 곧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 것이다. 그리 느껴질 정도로 희망이 없다. 그래도 나는 주를 신뢰하고 그에게 나의 일을 아뢸 것이다.’ 어디서 들었음직한 말 같지 않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는 다니엘과 그 친구의 신앙도 같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신다 해도 우리는 그분을 신뢰한다.’ 그런 소리 아닌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이러한 신뢰는 평소 저가 그만큼을 쌓아온 믿음이 있어서이다. 욥이 괜한 말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하였다거나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2:10).” 하는 표현이 어쩌다 나온 말일 수는 없다. 곧 우리에겐 모든 다 말해도 되고 어떤 표현을 어떤 방식으로 하여도 되는, ‘시편의 세계’가 있다. 오늘 욥기 3절,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하는 저의 당연함은 평소 그러하였던 익숙한 관계의 편안 표현이다. 하나님도 기꺼이 이를 좋아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내 무엇도 다 들어주시고 말해도 되는… 종종 누구의 글이나 말을 들을 때 벅차오르는 감정 중에 하나는 ‘그런 말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나 같은 자에게 털어놓는다는 것만으로 귀할 때가 있다. 물론 주께 아뢰는 일환이겠지만 “너는 나에게 기억이 나게 하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는 말하여 네가 의로움을 나타내라 (43:26).” 어찌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나? 한데 그래도 되는 사이, 오히려 이를 어려워할 때 하나님은 서운해하신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40:27).”
종종 누가 읽을 걸 알면서도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거리끼지 않고 묵상글에 쓰는 것은 나의 하나님께는 그래도 되어서이다. 오히려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더한 말도 거침이 없겠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청소년 시절에 지옥 같았던 학창시절과 더 앞서 어린 것이 감내하기 어려웠을 막말과 막대함에 대해 새삼 대단한 앙금을 안고 살지는 않는다.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욥의 모습은 사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상할 게 없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이처럼 따져 묻기도 할 수 있는 것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 그리 허용된 관계이다.
하나님께 못할 말이 어디 있겠으며 함께 주를 아는 사이에 꺼릴 말이 무엇이겠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7:14).” 이를 신약에 와서 바울은 더욱 우리 삶에 밀접하게 연관지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이를 사람에게 섣불리 떠벌였다가 그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고, 자신이 한 말이 자기로 의기소침하게 할 수도 있지만 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이를 우리가 서로 알고 믿고 의지한다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6).” 그러므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0, 23).” 그런 허울뿐인 것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 이를 오늘 욥의 고백이 하나의 표현으로 다 담아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아뢰겠다는 것인데, 그럴 리 없다는 그만한 믿음과 그러하신다 해도 괜찮은 관계에 따른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5).
이와 같은 경험 이상의 것,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는 곧 베드로의 설교와 같이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우리는 서로 그럴 수 있는, 그래도 되는 사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는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도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그래도 되는, 그래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에 우리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이는 곧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의 터이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11:1).
엉뚱한 소리에 마음 두고 살 일 없다. 저들은 저들 가는 길로 갈 뿐이다. 단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그리하여 양분하여 여러 갈래와 나뉘는 마음을 일심으로 모아,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86:11).
이와 같이 하나 된 마음으로 전심을 담아,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119:34).
그러할 수 있는 것이 주께서 그리 하게 하심으로였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오늘 내가 주를 바랄 때 이 마음이 내 것인 줄 알았는데 실은 다 주께 받은 것이었다. 돌아보니 우연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참으로 세심하고 섬세하셨다. 아, 그때 그 사람은 그래서 고마운 사람이구나! 그게 그러려고 그런 거였어? 하고 때론 놀라워하다 감사하다 누굴 그리워하기도 하면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11:3).
그렇지, 우리에겐 결코 무너질 리 없는 견고한 터가 있었지?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곧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그러므로 우리의 터, 결코 흔들림이 없는,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4).
오늘도 이는 여전하여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7).
곧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렘 23:23).” 저는 분명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이젠 다 잊히고 옛 이야기 속의 옛 추억일 뿐이지만 그때 그 시절, 그 애를 내 곁에 두셨던 것과 같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3).” 오늘도 여전한 은혜로 동일하시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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