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도서 6:12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편 77:10-11
어떤 일이 있을는지 우린 알 수 없으나 있었던 일을 보는 안목은 우리에게 있다. 오늘 전도서의 첫 구절이 이와 같은 안목을 깨운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1).” 우리가 어떤 일을 두고 그것이 어찌 불행한지를 아는 일,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2).” 곧 하나님의 주도하심 아래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있다.
심지어 우린 우리 속에 있는 것을 아나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 그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한 행실로 나타난다. 자칫 탐욕이 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이는 우리로 미끄러지고 넘어지게 할 수 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그러니 사회생활이란 게 혹여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성경의 이어지는 당부는 우리가 그만큼 쉬 넘어지는 지점이었다. 그러니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6).” 오늘 지혜의 안목이 남은 생을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도 바울은 이를 알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생 너머 저 알 수 없는 지점에 이를 준비를 하는 것으로,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9).” 오늘 전도서의 이와 같은 언급이 말씀으로 가까이 서게 한다. 욥의 고백과 같이 비로소 우리도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뉘우침과 깨달음이 있어야 했는지. 결국 지혜의 말처럼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이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죽어야 살고, 살아서는 주를 의지함이었으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39:6-7, 84:10-11).
이러한 말씀을 조금은 알겠다. 말씀은 눈으로 들어와 마음에 뿌리내린다. 혹은 귀에 닿으면 사라지기 일쑤지만 더러는 마음에 박혀 그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다. 가만히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11).”
어제 저녁은 일찍 돌아온 딸애가 나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앨범으로 가지고 다니는 사진들을 들춰보았다. 문득 잊고 살았던 나의 연애시절도 있었고 아이들 어렸을 때 그 부모도 어리기만 한 모습에서 놀라웠던 모양이다. 이때가 내 나이였겠네? 하며 어떤 마음을 비추기도 하면서, 나는 전혀 다른 나를 들여다보며 너무도 까마득하여 아득하였다. 애가 몇 장의 사진을 가족방에 올렸더니 때 아닌 사진전이 열린 것처럼 각 가정마다 예전에 가지고 있던 사진들을 몇 장씩 공개하였다. 아버지 말처럼 때 아닌 사전전이 열린 셈이 되었다. 하긴 남는 게 사진뿐이란 말, 나는 이 말이 참 쓸쓸하면서도 희한한 위로가 되었다.
우리의 수고란 게 고작 이 ‘헛된 생명의 모든 날’들 때문이었겠나? 오늘 전도서도 이를 짚어주는 것이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12).” 아, 그래서 바울은 그때마다 일체의 자족하는 비결을 강조하였구나?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그래서 시인은 노래하길,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7:9).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오늘에 족한 줄 알고 장래의 소망, 우리 마음에 두신 소망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복에 있일진대,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저녁을 물리고 뜻하지 않은 사진전을 감상하며 인생이 한 뼘 길이만도 못한 것을 새삼 알았다. 까마득한 것 같았는데 고작 몇 날 전의 일들 같고, 그땐 또 그런저런 문제들로 아등바등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이 덧없음을. 그리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하는 전도서의 탄식이 이해는 간다. 이를 안다면 성경은 가르치시길,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할 때에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77:1).
오늘 아삽의 시는 마치 나의 심정을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내 음성으로…’ 내가 아뢸 수 있는 나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과 긍휼하심에 대하여,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삼하 22:7).”
어제는 그렇게 회상하게 하는 날이었는지, 손위 처남은 모처럼 처와 같이 여수로 여행을 갔다. 줌으로 예배를 참여한 뒤 ‘애양원교회’를 물었고, 오후께는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잘 정비된 손양원 목사의 기념관이나 예배당, 병원과 그 주변 풍경이 낯설면서도 눈에 익어 마음을 쿡쿡, 찌르는 듯 어떤 그리움인지 고마움인지 알 수 없는 마음에 허우적거리기도 하였다. 예전엔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소경 장로인 지장로님과 찍은 사진은 없고 이순임 권사님과 손 잡고 찍은 사진은 내게 있었다. 아들 다섯 살 땐가? 둘이 여행 가서 예배당 앞 커다란 나무 밑에서 찍은 사진도 있고…. 마음에 뿌리 내린 어떤 말이나 사람이나 상황은 수십 년이 지나고도 여전한가보다. 옛사랑이었을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엇비슷하게 서서 찍은 '소녀'를 보고 있으려니까 딸애가 궁금해했다. 문득 보고싶다고 하니 곁에서 아내가 핀잔을 했다.
이를 다시 말씀으로 가져와 그 마음으로 되새길 때,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5-6).
그러한 세월이 또는 기억이 우리 심령으로 주를 바라게 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는 것이어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86:17).
그땐 저들을 내 곁에 두시고 나를 돕는 이들로 삼으셨을 것을, 우스운 고백 같지만 가끔은 이문세의 ‘옛사랑’이니 조동진의 ‘제비꽃’ 같은 노랠 들으면서 가슴이 푹, 꺼지는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참 어렸고 어려워하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덕분에 잘 지나왔고 더러는 그리워하다 고마워도 한다.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77:11-12).
오늘 시편을 나는 이처럼 마구잡이로 감상에 젖어 그리워하다 위로를 얻기도 하면서 묵상한다. 성경의 역사가 저들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된 이야기라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내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은 항상 기이한 일로 나의 날들을 돌보시고 함께 하셨음을 안다. 이런 기억을 더듬어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뇐다. 그때 그 아이, 혹은 어떤 이의 위로와 함께 하던 동행이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3).
나는 오늘 시인의 탄성이 내 것이 되는 것을 그냥 둔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이에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14-15).
저가 나의 하나님이시었다. 그와 같이,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19).
나의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더욱 더 선명해지는 것,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0) | 2023.02.15 |
---|---|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0) | 2023.02.14 |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0) | 2023.02.12 |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0) | 2023.02.11 |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0) | 2023.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