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전도서 7:29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편 78:72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가, 아신다. 오늘 시편에 먼저 귀 기울이면,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 78:38-39
마치 이 땅에서의 삶으로 끝장낼 것처럼 삶을 영유하기 원하지만 과연 여기서 영원한 게 무언인지. 하여 지혜는 말하길,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1-2).” 다소 음울한 진술인 것 같지만 이만치 나이가 들고 더 들어 노인이 된 이를 보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는 말.
당시 중동지역은 기름이 귀하여 값비싼 향유로 귀한 이에게 쓰이곤 하였다. 한 여인이 구원하심을 받고 그 기쁨이 감격스러워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주 앞에서 행하였던,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39).” 그와 같이 비싸고 귀한 것으로 이 땅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좋은 이름’이라 하면 그 삶이 의로워 인격적인 삶으로 이해된다. 평판이 좋다는 말, 누가 어떤 이의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어떤. 명예이거나 그 삶의 족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 전도서는 이를 서두로 하여 ‘좋은 이름’을 강조하였고, 이를 일컬어 ‘지혜 있는 자’로 이해해도 되겠다. 곧 ‘옳은 데로 돌아오는 자’로 영생을 받은 자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2-3).”
이에, ‘좋은 이름’을 가진 자로는 좋은 향기가 나서 그 이름만 떠올려도 가만히 미소 짓게 하는,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그에 따른 지혜의 지론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2-3).” 곧 우린 너무 사는 데 급급하여 그 삶의 즐거움과 보람을 찾고자 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마음을 두고 살았다는 것을 일깨운다. 하나 우리의 신앙이란 이 땅의 것에서 내세를 소망하는 것으로 “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히 4:3).” 우리의 안식 곧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우리 주님도 낙원을 언급하실 때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4:3, 23:43).” 내가 주와 함께 거하는 일. 죽음은 그 관문이고 초상집은 그 일에서 슬픔의 자리가 아니라 축하의 자리여야 옳다. 바울은 일러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이 땅에서의 삶은 죽음과 영생에 ‘낀 시간’이었다. 죽음 앞에서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바로 그 소망을 일깨우는 일이 초상집에서였으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전 7:3).”
오늘 지혜자의 설명은 염세적인 게 아니다. 오히려 더 희망을 말한다. 이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그러함은,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141:5).
이는 지혜의 단면이 아닐까? 그래서도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5).” 그런데 요즘 어디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쉬운가? 내남없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는 일이 누구의 책망과 훈계를 듣는 일보다 낫게 여기는 법이다. 이에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6).” 슬픈 건 죽음이 아니라 살아서 그 삶을 전부로 알고 죽음을 염두에 둘 줄 모르고 사는 일이겠다. 왜 그럴까? 오늘 지혜서는 마치 교과서적이다.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7).” 우리 안의 내적인 탐욕과 외적인 뇌물이 우리로 우매하게 명철을 잃게 하였다.
아, 그러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8-9).” 이를 교회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을 떠나는 삶으로 보면 기껏 잘 믿는다고 여겼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탈회심’을 하는 경향이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배교한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3-4).”
그런 자의 영혼은 실족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할 때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0-12).” 어쩌면 이것도 오늘의 실상이다. 그리하여 믿음에서 파산하는 사람들,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8-19).” 아니면 우리도 언제 어떻게 파선하여 믿음을 저버릴지, 혹은 그와 다를 게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는 곧 여호와를 배반함이다. 반드시 그 날이 오면,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습 1:6).” 이와 같은 두려운 말씀은 그러한 자가 많기 때문인데,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결국 저러다 ‘우리에게서 나간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이는 마치 ‘잘린 가지’ 같아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이는 너무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같이 하다 하나는 있고 하나는 없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 이런 말씀 앞에 머리가 쭈뼛하고 서야 옳다. 덤덤하니 막연하게 나는 그럴 리 없다 하는 것은 불행이다. 오늘 전도서는 그런 자들이 자주 하는 말,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10).” 곧 우리가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덴 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주저하기 때문이다.
그의 결국은 버림당하는 일로, 천하의 바울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저가 과연 믿음이 없어서이겠나? 신앙이 안 돼서 그런 생각을 했겠나? 우리의 됨됨이란 게 그러하여서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11).” 오늘 지혜자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이처럼 말씀을 가까이 하고 가까이 하게 하심으로 주어진 날에 충실할 수 있는 것,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12).” 여기서 쐐기를 박듯 지혜자의 분명한 진리 하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능하심이 없는 게 없으신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사는 태도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전도서는 구절과 어절마다 발목을 잡듯 멈추어 서게 한다. 그리고 이르기를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일,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27).” 곧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29).” 하나님이 본래 만드신 나에게서 나는 너무 멀리 떨어졌다. 심하게 어그러져 굽어서 더는 쓸모가 없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78:33).
오늘 시편이 일깨우는 소리,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곧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그러므로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 죽음을, 그 너머의 영생을 사모하는 일이란,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38-39).
이와 같은 한계 그 이상으로 우리를 구별하신 주의 긍휼하심을 알고,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출 13:8).” 주 앞에 바로 서서 오늘도 나를 지키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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