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전봉석 2023. 2. 21. 05:19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아가 2:14-15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 85:10-11

 

 

샤론은 광야나 평원을 의미한다. 척박한 곳에서 수선화가 피었다. 골짜기에 백합화가 자랐다. 이를 성경은 고유명사로 사용하며 ‘샤론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백합화’로 쓴다. 소유격조사 ‘~의’를 사용하여 광야와 골짜기의 꽃이다. 앞서 솔로몬은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로 높였는데, 자신은 단지 들꽃에 피어난 척박한 땅의 볼품없는 수선화일 뿐이고 백합화일 뿐이라 낮춘다. 이는 겸손이어서 온유함이다.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삼상 25:41).” 아비가일은 엎드려 자신을 낮춘다. 우리는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은혜를 바랄 뿐이다.

 

서른다섯 살의 어린 목사는 주일 날 아침 맡은 주일학교 사역을 감당하려다 응급실로 실려 갔으나 심정지로 사망했다. 자신의 아이들 목사님이라며, 월요일 이른 아침 누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하여 울었다. 이제 서른다섯, 저에게는 홀어머니가 계셨고 누이는 영국에 살다 이와 같은 비보를 듣고 들어오는 길이라 하였다. 아직 어린 목사의 소형차는 교회 주차장에 주차되었고, 저의 가방은 주일학교 예배실 앞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울면서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하는 누구의 말에 가슴이 저렸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나는 저의 말을 듣다 같이 울었고 긴 한숨을 내쉬다 진정하고 말해주었다. 참으로 복된 죽음이다. 우리는 슬픔을 앞세우고 어떤 아쉬움을 달래지만, 귀한 죽음이다. 같이 울어주고 같이 슬퍼해줘라. 그러나 주께 감사하자. 하고 더하기를,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 6:21-22).”

 

오늘 아가서는 나의 마음을 아시고,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1-2).” 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주의 은혜를 바라게 한다. 우리의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 가지가 자라고 꽃이 피어날 때 찌르는 것이 사방이라,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매순간 반드시 습득해야 할 ‘섬김’의 필연이다. 우리에게는 이율배반적인 증거가 있었으니, 찔릴수록 향기를 낸다. 교회는 저의 장례절차를 맡아 빈소를 지키며 남겨진 홀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고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로 하였다.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슬픔 중에 참 기쁨을 알게 하시는, ‘찌르다’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가시나무를 생각하면 이는 우리를 낮추어 주를 높이게 한다.

 

우린 이런 가운데 보내진 자들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사탄은 우리로 슬픔더미에 던진다. 고통 중에 패대기친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겔 2:6).” 그런 중에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심은 우리의 전심(全心)이 그런 중에 살아나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곧 우리는 성숙해지려 섬김을 습득한다. 매순간 가려내야 할 것을 알게 하는 기술이다. 이때 우린 먼저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 이 일은 시작된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1).

 

설교원고 작성을 위해 본문을 읽다 우리가 섬김을 위해 행하는 첫 행동이 우러러봄이라는 사실 앞에 놀라웠다. 우리로 그 시선이 주께로 향하게 하는 일, 나는 이제 서른다섯의 어린 나이의 목회자를 생각하고 저의 죽음 앞에 어떤 향기를 느낀다. 시편은 한 장의 스냅사진 같다. 주어진 그림 하나를 놓고 우리를 상상하게 한다. 시편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지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 방법을 찾을 단서를 준다.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우린 저를 올려다 본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아 2:3).” 오늘 본문의 그와 그가 앉은 곳에서 그를 맛보아 알 수 있는 즐거움이 소개된다.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하는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우리로 소망하게 하는, 그 사랑의 그늘에 앉아 기뻐하고, 그 열매의 달콤함을 알려준다. 이로써 주를 우러르게 하는 가시나무 사이에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7:8-9).

 

주께 바라는 것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미 4:4).” 우리로 슬픔 중에 기쁨을, 고통 중에 감사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이는 우리의 필요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 얻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의 섬김은 바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마주하게 하신다. 진정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내게 필요한 것을 몰라서 구하라 하시고, 찾아라 하시고, 두드리라고 하시겠나? 바로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러르며 이는 시간이나 물리적인 공간의 의미가 아니라 그때 우리의 자세를 일컫는 말씀임을 알게 된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역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기어이 만나게 되는 내용들이다. 우리는 막 찌어낸 찐빵 같이 신앙이 처음 익을 때는 부드럽고 따듯하고 보드라운데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지고 굳어져서 나중에는 딱딱하여져서 먹지도 못하고 버려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방비하기 위해서도 쪄서 그 뜨거운 습기가 배어야 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섭리다. 이를 알 때 우리의 고백은 놀랍도록 따듯하고 보드랍고 말랑말랑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34:8-9).

 

비록 어떤 슬픔이 또는 고통이 우리를 옥좨 죽을 것처럼 힘에 겨우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아 2:4).” 오늘 아가서는 우리에게 복된 자리로 내어준다. 그리고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5).” 우리로 주를 사랑함이 몸살 같게 한다. 상상만 해도 설렌다.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6).” 이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이다. 주님은 손짓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러므로 이제,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하여 우리는 가시나무 사이에 심겨진 백합화로 향기를 낸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6).” 누구에겐 저의 죽음이 한 꽃다운 나이의 죽음으로 슬퍼할 일이겠으나 누구에겐 그 영광스러운 참되고 복된 주의 품으로의 안식이었다. 오늘 성경은 손짓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0-13).”

 

이를 대하는 자들로서 주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14).” 이를 우린 그리워하고 사모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히 2:11-13).” 자 이제 무얼 해야 하나?

 

오늘 아가서는 경계를 풀지 않는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15).” 행여 오늘의 슬픔이 또는 고통이 우리의 포도원을 망치지 못하도록… 누가 울면서 어쩜 그러실 수 있나? 하고 슬픔을 내뱉을 때 나는 경계하였다. 슬픔은 어깨동무를 하고 오기 마련이지만, 일어나라. 우리 안의 작은 여우를 잡으라. 왜냐하면,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아 2:16-17).”

 

우리에겐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고, 함께 부를 사랑의 노래가 여전하였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사 52:11).” 이는 우리의 사명이면서 동시에 찬양이 되었다. 우는 자와 같이 울면서도 저를 주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사랑하기를.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이를 오늘 시편으로 가져오면,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85:1-2).

 

하여 오늘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늘에 계신 주를 올려다본다. 올려다보며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 곧 우리의 섬김은 앙모함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도저히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 은혜를 바라게 하는 원동력이 섬김이었다. 설교원고 초안을 잡다 그 내용 가운데 은혜를 바라는 것이 연거푸 세 번씩이나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123:2-3).

 

이 세상을 가로지르며 천성을 향해 간다는 것은 이와 같은 가시나무 사이, 심한 멸시 가운데로 지나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오늘 시인은,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85:3-6)

 

우리로 주의 백성을 삼으신 이가 그대로 있으시겠나?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7).

 

우린 이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24:7, 9).

 

하여,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85:9).

 

우리의 섬김은 이 한 길로 이어지면서,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0-11).

 

그러므로 세상이 우릴 노여워하게 하고 슬퍼하게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