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전봉석 2023. 2. 24. 05:08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가 5:2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편 88:13

 

 

 

하나님은 항상 먼저 반응하신다. 부부의 사랑이 서로 먼저 위하고 귀히 삼는 것 같이, 엄마가 아이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이 ‘사랑은 응답이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1).” 오늘 아가서는 이를 즉각적으로 알린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즉각적이고 적극적이고 필사적이다. 저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몸을 입고 우리 곁에 오셨다. 저의 전 생애는 오로지 우리를 향한 마음이 전부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그의 구원이 성취되기까지,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아 5:4-5).” 죽음으로도 그 사랑을 다 이루시는 그의 사랑을 두고 우린 무엇에 마음을 빼앗겨 살고 있는지….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115:4-7).

 

그럼에도,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18:6).

 

곧 우리 주의 사랑은 내가 미처 아뢰지 못할 때에도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4-25).” 주 안에서 평안하다는 것, 아무리 어둡고 암울한 시절을 산다 해도 주는 오실 것이다. 오늘 아가서의 증거이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2).”

 

매우 깊은 밤 혹한 새벽에 주의 머리털에 밤이슬이 가득하시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주는 오지 않을 것이라 여겨,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3).” 우린 너무 쉽게 방심하고 타협하고 산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을 강하게 붙드는 힘은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4-5).” 그렇듯 생의 어떤 순간, 더는 어찌할 수도 없는 순간이 곧 올 것이어서,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3-44).” 설마, 하고 있을 때가 가장 유력하다.

 

누구의 죽은 소식을 듣고 나는 저의 죽음을 영광되다, 하고 감히 말한 것은 그 자리가 복되었다. 순간 오라 하실 때, 나는 어디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러한 생각을 하다 불현듯 두려움이 앞서는 까닭도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행여 어느 부끄러운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까 하여 이를 대비하는 삶으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이번 주간은 이런 생각이 늘 가까이 하였고, 요즘은 이른 점심으로 아내와 같이 동네를 서성이다 같이 무얼 먹고 커피를 마신다. 노모를 모시면서 알 수 없는 어떤 답답증을 호소하여 그나마 그 시간이 숨통이 트이는가 하여 같이 김밥 한 줄이라도, 어제는 라멘을 한 그릇을 먹고 그 값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들어갔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사랑 이야기는 이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6).”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8).” 사모하여 병이 들 정도이다. 우리 마음은 늘 마음 같지 않아서,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9).” 모든 걸 얻고도 정작 있는 줄 모르는 자의 최후에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왜 우린 늘 잃고 난 뒤에야 소중하였다는 것을 뒤늦게나 알까? 우리가 주를 닮아가는 것처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우리로 능히 그러할 수 있는 힘을 그때마다 더하신다는 사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불쑥 묻는 장모의 질문 앞에 혹은 아내의 어려운 심정을 두고,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2).” 곧 누가 어떤 일로 슬퍼할 때, 혹은 상심이 커서 어려워할 때 나 역시 저보다 못난 사람이나 기꺼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보면 다 주가 하신다.

 

설교원고를 이리저리 뜯어고치다 보면, 누구 말이 내심 마음에 남아 마음을 쓰다 보면… 어느새 활짝 열린 문과 같이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거한다는 일의 실제적인 것들에 놀란다. 이는 개념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었다. 실상이며 현실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그렇게 곁에 둔 이부터 가끔 연락이 닿아 두서없이 말을 잇는 누구에게까지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10).” 우리로 구별됨을 알리시는 오늘 아가서의 한 구절을 오래 되씹는다. ‘희다’ 하는 것은 ‘빛나다’, ‘눈이 부시다’ 하는 말과 같이 우리 영혼이 주 앞에 온전하여서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다.’ ‘뛰어나다’는 ‘세우다’, ‘높이다’ 하는 의미여서 우리로 특별하도록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주의 모습에 우린 반한다. 그리로 인도하는 깃발과 같이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곧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 우린 주를 바란다.

 

카페에 앉아 아내는 두서없이 말을 한다. 나는 저의 말에서 복잡 미묘한 심정을 읽는다. 친정엄마가 좋으면서 그 어떤 답답함에 대하여 서로는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싫은 게 아닌데 어렵다. 엄마가 오고 난 뒤 뒷골이 자주 아파, 하는 말에 어떤 심정인지 알 것도 같다. 가까이도 멀리도 할 수 없는, 불가근불가원한 마음이랄까? 해서 요즘 나는 이른 점심을 먹고 아내와 잠시 동네를 서성거린다. 그리고 저녁에는 장모와 한 상을 하고 밥을 먹고 성경을 나눈다. 어제도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옛 이야기에 나는 자주 장모의 말을 말씀으로 닫게 하였다. 아내는 식탁 밑으로 툭툭 나를 찼다. 그만 끝내라는 것인데, 노모는 자꾸 더 말이 하고 싶으신 것인데… 우리는 저마다 말을 더해도 다할 수 없는 말들을 마음에 품고 산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는 것도, 그러니 우리 삶이 어쩜 그리도 정교한지. 나는 어제도 했던 말을 다시 하며 늙으신 장모를 다독인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말이 쉽지…’ 하는 말이 있듯이 말씀이 그런데도 우린 어쩜 숱한 갈래의 길을 오락가락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나야말로 요즘 ‘단순해지자’ 하는 생각을 무슨 주술처럼 되뇌곤 한다. 다들 너무 사는 게 참 너무 복잡하다. 노인은 그와 같은 마음으로 개미지옥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 아,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16).” 주님이 우릴 사랑하신다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희한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인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9-10).” 그의 통치와 권세가 없으셨다면 우린 대체 무엇으로 이 남은 생을 다할 수 있을까?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88:1-2).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누구의 죽음 앞에서 혹은 나의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130:1-2).

 

모두는 설마, 하고 자신도 곧 닥칠 일을 외면하고 살고 있지만… 응답이 없으면 사랑이 아닌 것을.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는 즉각적으로 나를 찾아오신다. 나는 주를 바라만 보았는데도 주는 내가 말하지 않은 소리도 다 들으셨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22:24, 31:22).

 

이와 같은 날에,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88:4-5).

 

주께 아뢴다. 가만히 주의 이름을 되뇐다. 하면 주는 먼저 아시고 우리 곁에 함께 계셨다. 모든 다 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2-13).” 주가 더하시는 마음으로,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6, 8).

 

그런데 그런 곤란한 때에 주를 바람으로,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9-10).

 

곧 우리 주는 산 자의 하나님으로,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