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전봉석 2023. 2. 26. 05:41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아가 7:10-11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편 90:17

 

 

 

주의 사랑하는 자로 사는 일보다 고귀한 게 없다. 나를 향한 주의 탄성처럼,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6).” 하고 저의 기쁨이 되어 산다는 일은 더불어 기쁜 일이다. 이는 마치 추수하는 날의 얼음냉수 같다. 귀하다는 말,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하고 오늘 아가서의 묘사는 매우 구체적이며 아름답다. 우리는 엄연한 하나님의 기쁨이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우리는 주의 신부가 되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3:29).”

 

우리의 이 충만함은 그가 우리 안에 말씀으로 함께 하실 때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이를 아는 것은 그를 높이며 그를 품고 사는 일이기도 하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잠 4:8).” 우리의 누림은 이 땅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곧 우리가 느끼는 날들의 기쁨에 대하여 아,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아 7:6).” 오늘 아가의 탄성이 저절로 기쁘고 즐겁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럴 때의 즐거움과 함께 고요함은 사람을 매우 단순하게 하는 것 같다.

 

가령 어제도 그렇고 요즘은 평일이고 주말이고 나는 거의 교회에 있다. 장모가 오시고 난 뒤에는 특히 공휴일이나 토요일에도 평소와 다를 게 없이 하루를 보낸다. 이런 날은 사무실마다 비었고 복도에도 사람이 없어서 나는 서성거리며 자주 시선을 놓친다.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일에서 이때가 아니면 어찌 맑고 고요한 영성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어떨 때 외롭다가 어떨 때는 적적하여 이래도 되나? 싶다가도 한 마음으로 산다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8).” 그러니 보면 다들 사느라 너무 부산한 것도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이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

 

그렇게 혼자 있으면 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하루해가 금세 진다. 누구 일은 크게 다가와 주의 이름을 여러 번 되뇌게 하고, 내 안에 두시는 어떤 마음으로 나는 신음하듯 저의 일을 두고 생각한다. 혹여 통화를 하거나 만나면 그 세계는 확장되는데, 어제도 가만히 햇살 듣는 창가의 화초를 바라보다 시선을 뺏긴 채 한참을 그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주를 생각한다는 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0, 17)

 

누가 적어온 장문의 문자를 읽고 또 읽으면서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의 선하심을 간구하게 된다. 마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주를 사랑하고, 주가 나를 사랑하심을 알 때는 ‘어떤 어려움’으로 마음을 쓸 때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욜 2:18).” 주께 아뢰고 또한 저를 신뢰하게 하시려고… 그러는 우리의 모습에서 하나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곧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어떤 벅찬 감정을 안고 가만히 시선을 놓고 있을 때, 오늘 아가서의 고백은 그런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아 7:15-16).” 하는 청유형 문장이 내게 손짓하는 것 같다. 곧 우리의 사색과 묵상과 깊은 마음은 누구의 표현처럼 ‘섬김에의 특별한 부름’과 같다.

 

누구를 생각한다는 일, 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마치 이런 게 아닐까? 이번에 손위 처남이 여수 애양원교회를 다녀오면서 사진을 두루 찍어 보냈는데, 내가 그 곳에 있는 동안 종종 저들의 ‘느린 시간’에 의문을 품고는 했었다. 가까이 지내던 소경 지 장로님과 이 권사님의 삶은 특히 그러했다. 저는 소경이라 늘 거의 한 곳을 응시한다. 딱히 말을 걸지 않으면 그렇게 굳어버린 사람처럼 미동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술은 중얼거리듯 찬송을 하거나 성경을 암송한다. 이 권사님은 몸이 불편하여 행동이 굼뜨다. 무얼 하나 옮기는 일에도 한나절이다. 그럼에도 저이는 이이의 식사를 차리거나 간식을 내오거나 필요한 것을 챙겨준다.

 

어린 나의 눈엔 저들의 느린 동작도 미동도 없는 모습도 늘 평안하였다. 굳이 말이 없어도 되는, 실제 이 권사님은 내게 찐 계란이나 고구마를 권할 때면 힘없는 팔을 허공에 흔들거리며 주름 깊은 턱으로 그저 까딱거리며 내 앞에 디밀고는 했다. 그렇다고 대화를 아예 안 하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 번은 소경 장로와 손양원 목사 일가의 무덤가에 앉아 물이 빠진 여수 앞바다를 보고 있을 때면 나보다 더 멀리 어디를 시선을 두고 있는지, 저는 말도 없이 무얼 그렇게 한참씩 응시하고는 하였다. 문득 그때의 평안함, 어떤 고요함을 느꼈다고 할까? 창을 내다보고는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얼마쯤일까? 그렇게 시선을 놓아두고는 하다 설핏, 저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오늘 시인의 기도처럼,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90:7).

 

행한 일, 행한 게 없는데도 행한 게 많은… 보이는 게 없을 텐데도 늘 바라보고 있던 내가 아는 어떤 이의 시선처럼. 나의 날은 그렇게 하는 일도 없으면 하는 게 참 많은 것처럼 여겨졌다. 고요란 사물의 모든 소리를 듣는 일이다. 지방에 사는 누구에게도 갔다가 어떤 이의 장례식장에도 갔다가 누가 안고 있는 그 마음에도 갔다가… 어쩌면 나는 어릴 때 내가 궁금해 하면서도 부러웠던 어떤 고요, 그 말할 수 없는 부산함에 대하여 꿈이 이루어진 것도 같다. 한참씩 교회 앞 양지바른 곳의 너른 평상에 앉았다 누웠다 했던 일. 그럴 때면 굳이 지 장로는 말을 걸지 않았고, 이 권사님은 뭘 그리 자꾸 가져다 놓곤 했었던….

 

오늘 아가서의 한 대목,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 7:12).” 하는 데서 나는 고요함과 동시에 부산함을 느낀다. 어떤 분주함 그러나 느리고 조용한 “합환채가 향기를 뿜어내고 우리의 문 앞에는 여러 가지 귀한 열매가 새 것, 묵은 것으로 마련되었구나 내가 내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 둔 것이로다(13).” 한 폭의 수채화 같기도 하고 정물화 같기도 한, 그렇듯 모자람이 없는.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빌 4:17).” 열매가 맺히는 데 있어 우린 가끔 어떤 고요함을 놓치고는 하는 것 같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어떤 조바심 때문에…. 그러나 열매는 마치 저절로 열리듯이 오랜 시간 기다림을 먹고 농익어간다. 그렇게…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90:1-2).

 

가만히 그저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신 것일 뿐이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8).

 

가끔씩은 빈 무선 이어폰을 귀에 꼽고 거리로 나가거나 혼자 있다. 주변소리를 차단하는 진공상태가 가능하여 나는 일부러 고요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 이어폰을 꼽고 있기도 하다. 모든 소리로부터의 단절, 이에 더욱 생생하게 들려오는 소리,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10-11).

 

이를 경험하고 사는 일,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3-4).

 

시공을 넘나들 수 있는 고요를 나는 조금 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고 싫고의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다만,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6).

 

모든 게 그저 그러하여서 사람에 대해서도, 사물에 대해서도…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9-10).

 

그러하여서 나는 종종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다가도 또한 그것이 생경하여 그때가 내가 진짜 나이었나? 하고 생각이 머물기도 한다. 어제는 저녁에 들어갔더니 장모가 흘러간 노랠 듣고 있었다. 식탁에 나와 앉으면서도 TV를 끄는 걸 아쉬워하는 장모에게 심수봉의 <나의 신부여>와 <백만송이 장미>를 밥상 위에 틀어주었다. 굳이 말이 없어도 한가득한 기억이 식탁 가득 차려진 듯하였다. 그저, 그런 것이어서… 그렇다는 것인데,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0-21).” 시간은 그렇듯 덧없고 속수무책이다.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146:4, 104:29).

 

이에 오늘 시편은 이를 기쁨으로 받는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4-15).

 

그리하여 우리 안의 고요, 어떤 평안함에 대하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