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18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편 92:12-13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그 노정은 여느 길과 달리 변수가 많다. 공격하는 것들이 수시로 노린다. 이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단지 유유자적하듯 이 여정을 계속할 수는 없다. 신앙에 타협이 없고 세상에 굴하지 않는다는 일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오늘 이사야는 그 여정에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하는 뜻을 가졌다. 실제 ‘구원’이란 단어가 26번 나오는데 여느 구약의 7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곧 우리는 구원 없이 살 수 없다. 늘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시면 우린 이 길을 계속할 수 없다.
이는 우리 자체가 악하다. 죄인이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악하여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죄인인데 죄악 된 세상을 상대로 주의 뜻을 좇고 선을 구하려 한다는 일은 그 자체로 벌써 위험할 것은 분명하다. 이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이를 성경이 공표하는데도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서의 신앙이라니,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시 62:10).
이는 경고다. 그것이 품은 위험요소를 미연에 알리는 장치다. 그럴 때 ‘우리 편’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시라는 데서 우리는 안도한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124:1-2).
연거푸 강조하는 ‘우리 편’, 이에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8).
주일이 지나고 다음 주일 본문을 놓고 여러 번 읽다 문득 드는 불안이 있었다. 우리의 신앙 노정은 위험하다. 곧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일은 세상적인 기준과 배치되는 게 많다. 주일을 지키는 일에서부터 사람을 대하고, 일을 중히 여기며, 주어진 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산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이다.
가령 주말에 직장 내 단합을 위해 산악을 한다거나 일상적인 술자리에서 여느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노는 문화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곧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하나님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숨길 수 없는 등불로 마을을 비추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곧 우리로 인해 어둠은 거둬지고 길은 드러나야 하는데 그럴 때 어둠의 저항은 당연하다.
또한 우린 주를 신뢰하고 복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적이지 못한 일에 대해 당연히 의사를 표시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그럴 때 쏟아지는 눈총과 질타와 공격적인 일들은 각오해야 한다.
오늘 이사야는 성경 중의 성경이라 하여 선지서의 첫 권이기도 하고 그 역사적인 배경도 히스기야 사후 웃시야와 요람과 아하스를 거쳐 바벨론 포로기에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때에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1).” 하고 첫 문을 떼는 구절에서부터 어떤 비장함이 느껴진다. 성도로 산다는 일은 계시의 세계에서 사는 일이다. 계시는 주가 열어 보이시는 세계로 말씀을 통해 보는 세상이다. 성경은 분명히 단언하시는 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이와 같은 선언에 대해 세계가 인정을 하겠나? 그 맡은 바 우리의 사명을 인정하겠나?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135:4).
우리의 존재 이유다. 우린 실제 성경을 알리고 변호하며 논쟁하여 논중하여 세상을 설득시켜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린 다만 선언할 뿐이다. 우린 증언자다. 하나님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뿐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여기에 우리의 사견이나 어떤 주장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설교는 창작이 아니고 설명도 아니다. 다만 선포다. 나의 이 묵상글은 고백이고 단순한 적용이지 타당한 어떤 근거로 증명하는 작업이 아니다. 다만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여 우리는 다만 주를 송축할 뿐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03:2).
그러한 우릴 상대할 때 세상이 호의적일 리 없다.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거나 그 완력을 거둘 리 없다. 고로 우린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할 뿐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이를 증명하는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렘 2:17).” 어느새 보면 신앙에서 비껴난 길을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오늘 본문은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3).” 이사야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은 내가 내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렇다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이것이 마땅한데 그리 살려면 부대끼는 게 실은 한둘이 아니다.
한술 더 떠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31).” 하시는데, 그리 살기란 세상을 가까이 하면서는 불가능하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 둘의 갈등은 당연하다. 신앙을 바로 지키려 할 때 그에 따른 세상과의 반목은 각오해야 한다. 이때 우리가 붙드는 진리는 오직 하나,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100:3).
그렇다면 그게 우리 편이신 줄을 우리는 안다. 해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돌아온 자를 두고 남겨진 자들의 공격적인 언행과 괄시는 필연적이다. 그러니 이를 견디지 못해 도로 되돌아가는 자들도 여럿이니,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 8:7).” 부디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94:8-9).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얼 더 주저하고 공연히 좌절할 게 있겠나?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4-7).” 오늘 이사야는 탄식하며 현실을 직시한다.
다시 강조해도 우린 증언자이지 창작자가 변명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그의 도우심을 우린 확신할 뿐이다. 살아서 사는 동안에 이를 사는 사람들이다. 도식도 어떤 이론이나 학설도 아닌 일상으로 말이다. 나 또한 생생한 증언자로 산 채로 잡혀 있었고, 탁류에 쓸려가던 사람이다.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이를 생각하게 하는,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124:3-5).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랬다. 아니, 나서서 내가 더 이를 좋아라 하고 누굴 끌어들고 함께 휩쓸렸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나는 여전하여서 한 시도 방심하였다가는 언제 또 탁류에 쓸려가고 산 채로 잡아먹힐지 모른다. 그리하여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사 1:8).” 오늘 본문은 겨우 남은 것에 대하여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6-17).” 달라진 면모를 보여야 함은 알린다.
우린 할 수 없다. 이를 인정할 때,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이를 시인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124:8).
하고 단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사 1:24).” 그렇다면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29-31).” 말씀이 우리로 기대하게 한다. 이를 주가 기뻐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이에 오늘 시편은,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2-3).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신다. 그렇게 나는,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4-5).
이에 따른 감복으로 사는 일. 세상은 나를 적대시하고 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소외된 자로 사는 일이란,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2-13).
이를 앎이다. 성경은 나를 가리켜 말씀하시고 있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에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12).” 그러니 우린 증인으로 세상의 위협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공격의 대상으로 사는 일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92:15).
이것이 오늘을 하루 더 연장하시며 나의 생명을 지키시는 이의 뜻이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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