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전봉석 2023. 3. 4. 04:52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사야 5:1-2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시편 96:1

 

 

 

즉각적으로는 유다 선민을 뜻하나 궁극적으로는 믿음의 자녀들을 지칭하는데,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7).” 앞서 포도원이 들포도를 맺음에 대한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대를 저버린 우리의 타락상을 오늘 말씀 중에 여섯 가지로 구체화하고 있다.

 

첫째는 물질에 대한 끝도 없는 욕심이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그런들 이를 누릴 수 없다는 것에 경고가 따른다.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9-10).”

 

둘째는 자기만족을 향한 열심이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있는 그대로 연락을 즐기려는 것인데,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12).”

 

셋째는 거짓에 거짓을 더하여 권력을 삼는 일이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어떤 권세도 십년을 가지 못하는 것인데,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19).”

 

넷째는 선과 악을 혼재시켜 혼탁한 삶의 추구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요즘은 모든 다 화합이란 명분 아래 교회도 이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다섯째는 스스로 옳다 여기는 신념이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이에 화를 자초하듯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삼하 22:28).”

 

여섯째는 인위적으로 자신감을 돋우려는 것이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스스로 옳다하고, 남에게는 네 잘못이 아니라 하며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죄를 질병으로 악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놓고 접근함으로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23).”

 

이렇듯 서로가 옳다고 하나 오히려 그 결과는 참혹하여서,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렘 12:10).”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 없고 자신들의 의와 노력으로 만족함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는 주를 떠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마치 꽃꽂이와 같아서 당장은 화려하고 향기도 진동을 하지만 곧 마르고 시들어 쓰레기로 버려질 따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을 채우시길 원한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3).” 오늘 본문은 절규하듯 외친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4).” 우리의 그릇됨이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서인가? 그 은총이 부족해서인가? 우리는 서정인의 <강>이란 소설과 같이 서서히 천재에서 둔재가 되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은 외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성장하지 못하면 퇴화한다.

 

하나님은 이를 이루실 것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이를 위해 우리를 흔드시고 어지럽게도 하신다. 곧 많은 포도가 아닌 질 좋은 열매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이내 이를 거역할 때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 3:9).” 그 추수는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주의 뜻에 합당하지 못할 때 교회는 세상에 밟힌다. 겉으로는 팽창하나 말씀은 약하고, 헌신은 많으나 추구하려는 사심이 가득하다. 누구는 그런 뜻에서 큰 교회로 갔다. 몇 년 후 보험왕이 되었고, 또 누구는 많은 이를 포섭하듯 다단계에 성공했다. 그렇듯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식으로 교회는 확장하고 사람들은 친절한 타인으로 교양이 넘친다. 그랬을 때 그 결과는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5-7).” 오늘 본문은 묵상의 깊이를 더하면 더할수록 오늘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어떤 의도가 있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나아왔던 자들은 일제이 외치길,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 27:25-26).” 참으로 너무 겁이 없다. 주를 경외할 줄 모르는 로마 총독도 놀랄 일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23).” 저들은 모두 예수를 따라다니며 병 낫기를 바랐고, 배고픔을 달래기를 원했으며, 어떤 기적과 이사 행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니 시편은 이른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1).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 나는 외형이나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내 안에 늘 부채감 같이 남는 ‘여느 교회들처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누른다. 이 모든 게 다 허사인 것을,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39:6-7).

 

나는 사실 종종 의기소침해진다. 접어야 하나, 하는 실의가 들기도 한다. 때론 한심할 정도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면 말씀이 나를 붙들어 세우시기를,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2:15-16).”

 

곧 내가 바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 복음을 알고 그 말씀에 전념한다는 것에서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어쩌면 목사고시 때, 면접을 세 번째 보면서 이번에 떨어져도 다시 올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기꺼이 평생을 그래도 좋다고 하였다. 그땐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릴 했는지 모르겠는데 더는 갈 데가 없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또 어느 원로목사는 어떤 목회비전을 갖고 계신가? 하고 물었고 나는 그 말에 의미도 모르면서 ‘내게 보내시는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으로 목회비전을 말했던 것인데… 모르겠다. 그때도 지금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는 없으나, 나는 늘 막다른 길에 선 것처럼 주를 바랄 뿐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1).

 

오늘 시편은 아시는가? 그런 심정으로 지금은 노모 한 영혼을 두고 쩔쩔매면서라도 내가,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96:1-2).

 

고작 나의 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고작 이것으로라도,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3).

 

오늘도 말씀 앞에 앉아 온통 주께 바라는 한 가지 일이다. 천국을 사모함으로 저의 늙음이 복되고 순결하기를. 누가 어디 목회지를 두고 씨름할 때 말 한 마디 거듦으로 어찌 주가 행사하실지는 알 수 없고, 멀리까지 대학 강의를 다니는 누구를 격려하며 그런 중에 주를 바라기를. 누군 이별을 하고 또 누군 사랑을 하는… 모든 게 복잡다단한 소식들을 두고 단 하나 내가 주를 부르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8-9).

 

부디 내 안에 주를 바라는 사실 하나가 늘 온전하여서,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1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