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이사야 6:13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시편 97:1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인격적인 관계는 그 삶을 바꾼다. 진정한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온전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책으로 본 사자와 실제의 사자는 엄연히 그 위엄과 위용에서부터 다르다. 이와 같이 성경으로 읽은 하나님이나 그 하나님 대하여 들어서 아는 하나님과 실제 삶 속에서 마주하고 함께 하는 하나님은 엄연히 다르다. 이와 같이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3).” 하는 오늘 본문 모두의 표현에서처럼 주님을 마주할 때 나오는 탄성은 경외감에서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마주하고자 설 때 여태 알고 살았던 모든 게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곧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8-29).” 이는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의 반응과 같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머리로 아는 하나님과 가슴으로 아는 하나님과 실제 생활 속에서 마주하고 사는 하나님은 다르다. 머리로 아는 경우 들었거나 누구의 말에 견주어 생각한다. 그 이상으로는 와 닿지가 않는다. 가슴으로 아는 하나님은 마치 드라마나 영화처럼 가슴을 울리다가 만다. 하나 실제 일상의 하나님은 있는 듯 없는 듯 때로 무덤덤할 때도 같이 함께 한다는 데서 동질감을 느낀다. 곧 생이 어떠하다 해도,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애 3:27-28).” 이를 인정하게 될 때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29).” 가만히 또한 분명하게 주를 신뢰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11).
이와 같은 시인의 찬송이 내 것이 된다.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4).” 곧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을 오늘 본문은 알려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러니 보면 자기 고집대로 사는 것 같다. 누구는 결국 혼자 떨어져 따로 세를 물면서까지 자식들과 남은여생을 같이 하지 못한다. 누군 이내 홀로 독처하다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생을 끝냈다. 멀리하던 자식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는 하였는지… 이게 보니까 노인이 된다는 것은 그 고집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 같다. 왜들 그처럼 자기 생각만 옳은지, 굽힐 줄 모르면 꺾일 수밖에 없다. 요즘 내겐 온통 그런 소식과 모습만 보이고 들리는 것 같다. 남 얘기 같지 않다. 나도 누굴 보다 저와 같을까 두렵다. 노인연습이 필요하다. 오죽하니 자식과도 파국으로 치달을까 생각이 드는 경우를 볼 때면 두려운 생각이 앞서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때 우리의 강점은 주를 의뢰하는 일이다. 주시는 이도 그리 두시는 이도 모두 하나님이신 것을 알 때,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애 3:29).” 격동하는 감정을 멈추고 그 입을 땅의 티끌에 대는 것,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65:4).
고요하고 온순하게 늙는다는 일은 복이다. 내 뜻과 같지 않아도 설령 그 감정이 상하였다 할지라도,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94:18-19).
가만히 주를 바라는 일. 이는 평소 내가 아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가능하였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그저 주만 따를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곧 주께 모두 맡김으로 주만 신뢰할 때,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부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요즘 나는 새삼 주를 신뢰하는 연습을 한다. 내 감정 혹은 앞서는 여러 생각을 물리치고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의 연단, 신앙은 곧 매순간이 연마였다. 단련하지 않은 날은 무뎌지고 녹이 슨다. 이때에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곧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113:5-7).
결국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나는 다만 아내를 돌보듯 위로한다. 어제는 손위처남내외가 오후께 왔다. 같이 있으면 어려워할 것 같아 늦게까지 교회에 남았다. 어찌 저들이 어려워하듯 떠넘기듯 하였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해가 된다. 왜 처남댁은 따로 집을 얻어 일을 핑계로 하였는지 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연일 아내는 두통을 호소한다. 아랑곳하지 못하는 노인의 외골수는 동일한 것인지, 누구의 사연은 우리보다 열 배는 더하다. 결국 그 집은 노인이 나갔다. 누구는 자식들이 요양원에 모시면서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이해못하다가 이젠 좀 알 것 같다. 사람은 본디 그 심성이 자기 위주라 자신을 먼저 하는 데서 하물며 자식들까지 두 손을 든다.
장모를 모시고 앉아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여러 번 어떤 벽 앞에 서는 것 같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때마다 주께 비는 것은 주의 마음이다. 주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나도 다를 바 없이 고약해질 것 같다. 아내의 새로운 면을 보며 놀랐다가 그렇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요즘은 아내를 위하느라 마음을 쓴다. 그러니 이게 길게 갈 이야기 같은데…. 새삼 우리의 됨됨이로 주를 바라며 주 앞에 온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를 생각한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다. 이에 성경은 이르신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6-7).” 누구 말 할 거 없다. 곧 닥칠 나의 일이기도 하여, 행여 나의 노인 됨이 두렵기도 하다.
주 앞에 온유한 자로 설 수 있기를. 하면 사람에게도 그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래서 우린 더욱 성령을 구하고 성령으로 살아야 하였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구해야 한다. 온전할 때, 한 살이라도 더 나이들기 전에 반드시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야 한다. 나이 든 이들이 까다로운 것은 자기 생각이 완고하여져서이다. 우리가 어른이 되고 더는 누구의 꾸지람도 듣지 못하게 되면서 그 인격은 날로 굳어져 딱딱한 석쇠 같이 된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행 26:16).”
나는 오늘 본문에서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 대목에서 주저하였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8).” 나에게 더하신 날들, 그 가운데 명하시는 사명을 두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9).” 주가 명하시는 그 일을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모두가 다를 게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13).” 결국은 베어져 다 잘리고 나서야 소망이 있다. 내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포기할 때,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97:1).
이 참 기쁨. 그 통치에 대한 기대뿐. 주님 가르쳐준 기도에서도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주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심으로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나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22:5).
내가 할 수 있는 길.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2-3).
우리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자신의 아집과 완고함에 있어서도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3).”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 5:16-17).” 이를 오늘 시인은 간구하기를,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97:3-6).
곧 때가 이를 것이다. 누구라도 노인이 될 것이고 자신의 고집대로 죽음 앞에까지 끌려가야 할 것이다. 도무지 누구 말을 들으려하지 않고 자식마다 자신들 옳은 대로 붙들고 흔들려할 텐데, “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여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하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겔 7:8-9).” 하여 나는 내가 두렵다. 나를 두고 주 앞에 아뢸 때 드릴 말씀이 없다.
왜 노인이 되어서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였는지, 그와 같은 순종의 삶이 우리에게도 어찌 필요한지를 알겠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2-3).” 이 확연한 구분을 명심하고 사는 일. 부디 나를 주 앞에 꺾고 또 숨을 죽여 그 쓰심에 합당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
(8-9).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 때,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10).
주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내가 나를 어쩔 수도 없듯이 누가 누굴 어찌 감당하겠나? 어릴 때야 야단이라도 치고 혼이라도 낸다지만, 노인들의 나라는 속수무책이다. 그래서도 무섭다.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사 1:29-31).” 다들 자기 고집에 깔려 죽는다. 그러나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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