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전봉석 2023. 3. 7. 05:19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이사야 8:13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편 99:1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그의 이름과 그의 자녀를 지키시는 데서 나타내신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1).” 하는 말씀이 오늘 첫 구절로 시작한다. 마헬살랄하스바스란 ‘빠른 약탈’ 혹은 ‘급한 노략’이란 뜻이다. 유다 곧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급속한 멸망을 예언한다. 이를 주의 종을 통해 전하게 하신다.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2).” 이 예언은 이루어졌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사 7:3-4).” 이어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 그럼에도 유다를 침공하려는 것을 두고 오늘 말씀은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징조’를 예언한다. 이렇듯 징조와 기사를 여러 번 보이시는 덴 저들이 믿지 않기 때문이다. 유다는 아람과 북이스라엘로 인해 곧 멸망에 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유다는 위기로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이에 하나님도 포기하실 만한데, ‘마헬살랄하스바스’를 알려 오히려 저들이 멸망할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때론 이 일이 더디고 오랜 기간 걸려서 우린 쉽게 잊곤 한다. 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된다. 보면 늘 악은 그렇게 평범하게 자행된다. 그러다 흔히 그럴 수 있는 사소한 데서 터져 나온다. 우린 이를 인식하고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심지어  미연에 안정장치를 고려해야 한다. 믿는 자로 이에 따른 심각성을 알고 또한 수시로 알리는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무료해지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하 19:30-31).” 이에 우린 붙들고 확신할 수 있는 말씀 위에 선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처럼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 사실을 알리고 기록하심으로 우리에게 알도록 하신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한데 이를 외면하거나 다른 데 우선하여 마음을 두는데,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실제 우리 생활 속에 얼마나 난무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하루 운세를 따지거나 점치듯 어떤 요행을 바라기도하면서, 생활 전반에 스며든 이와 같은 대수롭지 않은 것에 악은 깃든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0-11).”
 
결국 누구는 가고 떠나고 버린다. 한사코 외면하며 살길 바란다. 그런 때에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결국 굽은 길로 가는 자에 대하여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시 125:5).
 
같이 시작하였다가 누구는 남고 누구는 떠났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2-13).” 이를 우린 얼마나 조심하며 살고 있는지. 행여 스스로는 자신하여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자부하고 방심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구분되지 않는 신앙의 정도가 더 오래 지속되는 법이고 스스로도 속이는 중이다. 이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우리가 행여 ‘설마’ 하는 곳에서 악은 자라난다. 주를 멀리하는 자가 대놓고 주를 욕하는 경우보다 말로는 하나님을 두둔하면서 삶은 이미 떠나간 지 오래인 경우가 더 많다. 스스로의 믿음을 자부하는 사람들, 정작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내가 한참 주를 멀리하고 살 때, 늘 내 곁에는 적당한 저들이 있었다. 다 같이 믿는 자들로 나름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누구는 집사였고, 누구는 어느 무리의 리더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며 어울릴 때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사사로움을 누가 죄라 규정하는 일에 몸서리를 쳤다. 저마다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나라와 의는 구하려 하지 않았다. 무늬만 종교인으로 살뿐 정작 안 믿는 자들보다 더 과감할 때도 있었다. 이를 지혜서는 대비한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28:20).” 하여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2:7-8).”
 
곧 스스로를 속인다는 일은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견고한 신념이 있다. 오늘 본문은 이를 알려서,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사 8:7-8).” 곧 우리로 알게 하시는 주,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91:7-8).
 
결국 모든 악은 잠시다. 잠깐은 저들이 권세 잡은 듯하나,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9).” 그 결국이 어떠한지를,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10).” 이내 그 끝을 짐작하게 하심으로,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려 주시며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 것을 내게 깨우쳐 이르시되 이 백성이 반역자가 있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반역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11-13).”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을 바로 알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계 19:2-3).”
 
경고가 있는 말씀 앞에 두려워 떨 줄 아는 것이 지혜요, 주를 경외하는 자의 바른 자세이다. 곧 우리가 궁극적으로 두려워 해야 할 이,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 29:25-26).” 이를 듣고 자신을 살펴 자중하고 돌이켜 주 앞에 자신을 낮추는 일, 이를 두고 바울은 그토록 통회하며 괴로워하였던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우린 스스로의 모습에 얼마나 절규하곤 하는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어제 저녁 이와 같은 말씀을 두고 늙으신 장모와 함께 성경을 나누었다. 알아듣기는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나로 그 말씀의 심각성을 되새기게 하였다. 그러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이와 같은 사무침으로 주 앞에 앉았다.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4:26-27).” 부디 내 안에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더하심으로 또한 그의 긍휼하심을 바로 알게 하시기를.
 
나는 이처럼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게 복인 것을 안다. 아내는 언제부턴가 교회에 올라오면 기도를 하고 말씀부터 한두 구절을 읽는다. 그 행위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그러고자 하는 마음을 두시는 데에 감사하였다. 슬그머니 저를 바라보며 어머니를 모시는 데 있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소진되고 있는 자신을 주 앞에 아뢰려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오늘 본문 16절,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하시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이를 누가 억지로 할 수 없고, 다만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말씀 앞에 멈추지 못할 때가 문제다.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읽히지도 마음에 와 닿지도 않을 때 그 영혼은 파선하였고, 이미 떠났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11-13).”
 
오늘날 같이 풍부하였던 시절이 또 있었던가? 어지간한 자들은 모든 걸 다 누리며 산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먹고 마시고 입고 쓰고 하는 데는 풍성하기 짝이 없는데, 말씀의 기갈은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내가 무엇이 좀 나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같이 말씀을 나누자 할 때 교회 일에 열심 있는 순서대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다 안다, 이미 들었다, 시시하다고 여기는 데서 거절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저 사는 이야기, 주변 이야기로 노닥거리는 일에는 열을 올리면서 성경을 알자, 힘써 말씀을 같이 하자 할 때에 같은 길을 가는 ‘주의 종’들부터 싫어한다. 그리고 저마다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 성경을 가까이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친구가 3월부터 주말에 성경공부가 있다고 하여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회사 다니는 사람치고 주말을 쉬고 싶어 하는 마음은 백 번 이해하지만… 그래도 잘 참고 해! 하고 말해주자, 저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말씀으로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저마다의 삶에 쫓겨 그럴 겨를이 없다고 하면 그 또한 달리 방법이 없는 일이지만.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39:7).
 
부디 말씀에 붙들려, 다들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21-22).” 그러한 현상이 점점 더 몰려올 것을 알고 대비하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 앞에서 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99:1-2).
 
오늘 시편의 일갈처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부디 두려워할 걸 두려워하며 살 수 있기를. 하다못해 우리가 주의 자녀인데 참새만도 못하겠나?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29).” 주가 다스리신다. 나의 모든 생을 책임지신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33:12).
 
그러하다면,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99:3, 5).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이를 지침으로 삼고 살 때,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사 61:8).” 하여,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