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5
우린 불안정하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다. 우린 무엇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더 의존적인 존재이고, 어떤 확신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주를 바라고 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의존장치나 방어기제를 가지고 살 필요가 없다. 오늘 본문은 전반적으로 이를 알린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5).” 우리의 불안과 고통은 불타올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6).” 곧 우리의 불안과 방어와 무장이 풀어지고 평강의 주께 대한 견고한 의뢰가 있다. 이를 시인들은 찬송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시 46:1, 139:5).
이는 평강의 왕, 예수께서 날 위해 성부께 기도하신 내용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1-12).” 이와 같은 기도를 근거로 해서도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곧 아무리 세상이 어떻다 해도, 우린 이처럼 철저하고 완벽하게 보호하심을 받고 그 하나님께 의존한다. 그때마다 우리의 감정은 들쭉날쭉하다. 좋았다 싫었다, 흐렸다 개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거리는 기분은 우릴 불안하게 하고 염려와 근심이 떠나질 못하게 한다. 그런 우리로 안전을 더하시는 것,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125:1).
설교원고 초안을 붙들고 오며가며 여러 생각이 머물곤 했다. 이를 앎으로 우릴 불안하게 하는 요소들을 정직하고 용감하게 직면하고 대수롭지 않게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로 불안하게 하는 요소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우린 시온 산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나 신뢰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로 나를 붙드시는 데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더욱이 남들보다 더 죄와 사망이 그늘진 땅에서 참 빛을 바라는 일이다. 어둠은 여전히 어둠일 뿐이다. 하나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곧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면서 더더욱 어둠을 어둠으로 인식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에 오늘 이사야에서 우린 메시아로 오신 그의 탄생과 통치에 대한 예언에 주목하게 된다. 앞서 우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어둠’이었다.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사 8:22).”
하던 우리에게 오늘 첫 구절의 말씀은,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하는 선언적인 예언의 말씀으로 시작된다(9:1). 곧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에 우린 더 이상 요동하지 않는다. 시온 산과 같이 굳건하다. 그래서 시인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55:22).
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곧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우리가 빛이 필요함을 아는 것이 어둠에서 벗어난 증거다. 어둠일 때는 어둠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정도가 성도됨의 증거다. 더는 감정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여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굳건함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125:2).
이 확고한 사실 앞에 서는 일이다. 이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우리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연단하신다. 곧 오늘 이사야의 증언과 같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이제 그 사정이 역전됐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25:7).
더는 끌려 다니지 않는다. 모든 불안의 요인은 아픔과 고민 때문이다.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 극단적인 지점에 자살도 포함된다. 스스로 불행을 모면하려 할 때 불안은 가중된다. 그렇듯 ‘악인의 권세’가 더는 우리를 잠식하지 못하게 하신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125:3).
본문을 펼쳐놓고 오며가며 읽고 섰다보면 주가 더하시는 마음은 항상 새롭다. 그건 당연한 일이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3-4).” 우린 모두 그의 지으신 바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전에는 자신이 제일인 줄 알고 그리스도인을 잡아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예수의 구원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달하는 자가 되었다.
이는 바울에 대한 이야기면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된 자들의 공통된 이야기이다. 고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우리 이야기의 결론이다. 곧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제부터 우린 죽으나 사나 주의 것이다. 이 구원의 계약은 영원하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렇다면 중도에 떠나고 파선하는 이들은 어떤 경우일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 1:19-20).” 가령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같이 곁길로 가는 이가 많은데 저들의 구원은 그럼 어떤 것일까? 결론적으로 이들은 다 ‘자기의 굽은 길로 간 사람들’이다. 이를 이해하면 마치 내비게이션에 서로 같은 방향으로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표시되는데, 하나는 고가 위로 하나는 고가 아래로 달리고 있었다고 할 때와 같다. 저들은 처음 우리와 같이 고백하고 구주를 주로 시인한 것 같으나 스스로 굽은 길로 간 것이다.
믿음의 경로를 이탈하는 데는,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곧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결정이었고 지극히 자의적이고 의지적인 선택이었다. 우리 죄를 담당하려 오신 완전한 하나님,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벗어난 것이다. 오늘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에 따른 우리의 구원이 파선되는 경우는 없다. 하면 중간에 떠난 이들은 처음부터 같은 방향의 같은 길인 줄 알았으나 저는 고가 아래의 길에서 곁길로 갔다. 그럼에도 구원 사역은 이루어져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2-23).” 오늘 우리는 어리석은 세상에서 산다. 우리로 요동하게 하고 흔들리게 하는 요소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로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붙들고 살게 하시는 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2).
이와 같은 인도하심이 우리로 파선하지 않게 하신다. 전적으로 우리의 의지적인 선택인 것이면서 동시에 그리할 수 있게 하시는 이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다. 그러므로 우린 간구한다.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125:4-5).
자기 믿음은 자유라 언제든 선택할 수 있고 버릴 수도 있다. 하나 주가 주시는 구원의 믿음은 더러 흔들려도 파선하지 않는다. 좌초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시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그런 따위의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도 변개하실 수 없는 의지로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는 시인의 분명한 어조는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하여 그 이름, 그의 영광을 위하여도 타협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우리 안의 평강은 불안과 염려, 근심과 슬픔 따위로 가라앉을 수 있는 그런 감정 따위가 아니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배가 흔들릴 수는 있으나 우리의 구원의 방주는 그 항해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는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7).” 우리가 이룰 역사가 아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결과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사실인지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
기필코 주가 이루시는 구원이다. “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사 9:18).” 오늘은 저들이 기승을 부리고 마치 모든 권세를 누리는 것 같으나 우리는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이에,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100:1-2).
우리의 송축은 주를 찬미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곧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이는,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2:4).
더러는 세상으로 떠나고, 더러는 파선하여 어디로 흩어져 사라졌는지 알 수 없으나……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3).
이를 앎으로,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4).
우리로 찬송하게 하시려고 찬송이 되게 하신다. 곧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이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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