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전봉석 2023. 3. 9. 04:43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이사야 10:3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편 101:1

 

 

 

마음의 어려움을 주체할 길 없다. 뭐라 일러도 감당이 안 된다. 그 속을 누가 알까?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이는 혼재된 마음 때문이다.

 

오늘 북이스라엘의 혼돈과 부조리한 참상을 성경은 들려준다. 법은 멋대로 해석되고 약한 자를 억누르는 억압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1-2).” 그에 따른 경고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말씀이 막히고 왜곡됨의 실상이다.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6).”

 

성경의 경고와 그 이르심에 귀 기울이지 못할 때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능력도 상실한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말씀을 외면하고 듣기를 멀리하면 저의 날은 스스로 갇힌 감옥 같다.

 

분명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이는 누굴 위해서이기보다 자신을 위해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되돌아오는 축복의 경로를 가로막는 것들이 있다. 곧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시 109:17-18).

 

곧 성경에 이르심은 누구를 위해서도 중요하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수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이러한 말씀에 주목하고 눈여겨 사는 일, 오늘 북이스라엘의 참상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춘다. 악함을 두고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이끄신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사 10:5).” 주의 사람들이 얼마나 한심한 지경에 이른 것인지,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15).” 스스로 터무니없는 자부심이 우릴 걸려 넘어지게 한다.

 

결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모든 현상과 일정이 주의 뜻에 달린 것을 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40:8).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산다는 일은 일상의 모든 일들이 주가 이루시는 구원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이를 위하여 말씀 앞에 서고 어떤 일을 마음에 새겨 누굴 이해하고 어떤 마음으로 주께 아뢰어야 하는지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 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겔 31:10-11).” 우리로 이를 보고 알게 하신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94:1-2).

 

이에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일, 하나님은 그처럼 악한 자를 일으켜 주의 자녀를 교육하신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출 14:4).”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하시려고, 이는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결국 우리의 사회의 이런저런 문제를 두고도 저들은 이 시대에 그 역할을 위해 있는 것, 날 위한 훈계이고 교훈이게 하신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요즘은 아내와 장모 사이에서 생각이 많다. 힘들어하는 아내의 마음도 알겠고, 장모가 왜 그러는지도 이해가 간다. 저녁에 말씀으로 이를 전하는데, 그래도 보면 서로의 어쩔 수 없음이 문제인 것을 느낀다. 나는 중간에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한다. 아침마다 아내가 나와서 투덜거리면 이를 달래며 같이 점심을 먹는다. 저녁에는 장모와 같이 식사를 하며 저의 지청구를 듣고 같이 예배를 드린다. 보면 다들 저마다의 할 말이 있다. 우린 모두 그럴 수밖에 없는 각자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 결국 서로를 보며 자신을 주의하는 수밖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마찬가지로 일련의 사회 문제도 또는 근본적인 사람의 문제들도 알고 보면 모든 게 우릴 위한 하나님의 교재다. 다각도의 시청각이다.

 

때로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로 바로 서게 한다. 아내를 다독일 때 주로 하는 말인데, 이로써 우리가 주의 마음이 절실하고 그의 사랑이 필수적인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오늘 이사야는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20-21).” 이를 목적으로 오늘의 시련은 그 역할을 한다. 주의 관심은 오로지 주의 자녀에게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이는 전적으로 회개를 목적으로 하고,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우리로 정결하게 하시는 데 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10).” 오늘의 이런저런 일이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말씀을 펼치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그 기분을 헤아리려하다 주의 마음을 알겠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우리가 주 앞에 바로 선다는 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그러기까지 저의 세월이 어떠하였는지 우린 짐작할 뿐이다. 그 고통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나? 말로 할 수 없는 그 심정을 주께 아뢰며 주만 의뢰하게 하시는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루신다. 오늘 이사야는 외친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사 10:33-34).” 이와 같은 궁극적인 은혜,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1:4-6).

 

하여,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7:35-36).

 

어느 것은 한때일 뿐이고 어느 것은 영원한 것일 텐데, 이를 앎으로 오늘 시편은 우리로 찬양하게 한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101:1).

 

주께서 우릴 여기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안다면,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곧 오늘 나를 괴롭히는 것들의 몫은 나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데 있었다. 결국 저들은 귀한 쓰임인데,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이에,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2).

 

나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심으로,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우리가 거룩하여진다는 일은 참으로 오랜 시간 주를 알면 알수록 주를 더욱 바람으로 가능하였다.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왕상 2:4).” 그러기까지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고로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3-4).

 

주목하여 경계하는 것이 달라진다. 관심도 그 목적도 바뀌게 돼 있다. 하여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 이 작은 마음 하나를 지키는 게 아닐까? 주께서 주목하고 계신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6).

 

주 앞에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7).

 

그리 마음을 쓰며 살게 되는 일, 눈을 뜨면 우선적으로 주 앞에 나아와 말씀 앞에 세우는 까닭도….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하여,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