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사야 1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22
우리의 그 어떤 절망도 우리로 회개의 기회가 된다. 어떤 특정한 날, ‘그 날’이 오면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1).” 하고 오늘 이사야는 기도한다. 하나님의 용서와 안위는 삶에서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면 안다. 오늘 시인의 찬송이 결코 과장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03:22)
할 때에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2).” 하는 이사야의 이어지는 고백이 내 것이 된다. 결국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1-2).” 하는 그 심정의 고백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나도 잘 안다. 돌이켜 주의 길로 가게 하실 때 그간 나의 불순종의 삶을 일거에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가혹하셨다. 한데 이를 돌아볼 때,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하는 고백이 어쩌면 모든 신자들의 합창이 되지 아닐까?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한 강도의 마지막 기도를 부끄러운 구원이라 하나 구원에 어디 부끄럽지 않을 구원이 있겠나? 다들 면구스럽고 송구하나 영원한 찬양이 그의 뒤를 따를 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은 역시 동일할 것이다. 곧 주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찌 주 앞에 설 수나 있을까?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2-14).”
이는 곧 가까운 ‘그 날’에 있을 일들이다. 그 날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오늘에 나로 이 시간 주 앞에 앉히신 것도, 이와 같은 신앙고백에 함께 아멘, 하고 화답하게 하시는 것도 모두가…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96:1-2).
오늘 우리에게 두신 사명이며 그 역사의 또 하루가 된다. 이를 이사야는 가리켜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3).” 하고 우리의 그릇 행하던 날을 다시는 되밟지 않도록 한다. 그때는 어떠했던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장모는 다시 원기를 회복하였고 한상에 둘러앉아 죽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함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그때에 저는 말씀을 나누며 지난날 자신의 어리석었던 날을 회고하며 주의 용서와 안위하심에 감격하였다. 그 한 생을 열거하기에도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기구하였고 서글펐던 날들을 이제 돌이켜 찬송이 되게 하신 것에 감사였고, 이렇듯 우리가 둘러앉아 서로 다른 삶을 지나 같은 지점에서 ‘그 날을’ 소망하게 되는 것에 모두가 한 마음이었다. 곧 우리가 나눈 말씀 중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는 아무나, 어쩌다 그리 된 일이 아니어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하는 이 한 구절을 오늘에 여러 번 옮겨 적으며 그 의미를 묵상하시라 일렀다. 곧 우린 ‘미리 정하신 그들’이다. 이내 우릴 더는 두고 보지 않으시고 부르셨다. ‘부르신 우리를 또한 의롭다’ 하셨다. 의롭다고 하신 말에 눈물겨워 차마 뭐라 할 말이 없어 감격스러운데 그뿐 아니라,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시니 주 앞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뿐이다.
어제 오후 설교원고를 탈고하고 <트랙스>란 영화를 봤다. ‘위대한 실화’라는 타이틀이 붙는 이 영화는 존 커란 감독의 작품으로, 호주사막 횡단을 실행하였던 실화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영화 <나의 산티아고>나 <와일드> 같은 영화를 찾아보기도 했었다. 극한 도전이면서 무모한 발걸음이랄 수밖에 없는 사막 한가운데의 사투는 눈물겹다. 낙타 농장에서 일하고 낙타를 훈련시키는 것을 배우고, 세 마리의 낙타를 얻어 호주 사막 2,740km를 걸어서 횡단하는 이 내용은 가히 극단의 걸음걸음이라 할 수 있었다. 단지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뿐이에요.” 하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숙연한 마음도 들었다.
한 생을 지나는 동안 우리를 거쳐 간 모든 순간이 이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까지, 이내 이를 찬송으로 주의 이름에 송축하는 우리로서는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사 12:4).” 하시는 오늘 말씀 앞에 다른 여지가 없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5).” 돌이켜 오늘의 우리로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신 이가 그 지나온 날의 서러움과 울분을 어찌 모르시겠나? 장모의 사연은 한 편의 영화 그 이상의 감동이 있다.
누구의 사연인들 그러하지 않을까. 다만 우리로 주가 주신 생수를 마시게 하신 것으로 그 축복은 이미 충만하였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그와 같이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 앞에 감격할 수 있는,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사 12:6).” 하는 오늘 이 짧은 본문은 여러 의미를 함유하고 내포한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그러므로 우린 더 이상 사막으로 내몰리지 않는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앞서 내가 좋아하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에는 자신이 담을 수 없는 지난날의 상처들이 있다. 단지 상처 그 이상의 노여움이겠으나…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하는 고백이 우리에게는 모두 실현되었다. 대부분 그 노여움으로 다들 죽을힘을 다해 살지만 살아서 당도하는 곳이 결국은 죽을 자리뿐이라면 이 얼마나 허망하고 답답한 노릇인가? 그 안에서 나름 의미를 찾으려 하나 이는 산 자들의 또 다른 허망함일 뿐 결국은 죽음일 텐데. 이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사랑을 알면서 우린 비로소 각자의 사막을 벗어날 수 있다. 이에 오늘 시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03:1-2).
하는 찬송이 저절로 이어진다. 언제부턴가 내 안에서 이와 같은 독려와 격려의 소리가 들린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7:17, 47:6).
이는 모든 성도들의 공통된 모습으로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1-13).” 오늘의 이 복된 것으로 더욱 주를 경외하며 바라게 하심인데,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44:17).
지난날은 앞으로 영광된 날들에 비할 게 못된다. 나는 그 마음에 서린 게 많은 장모를 위로하며 우리를 부르신 것과 의롭다 하신 것과 또한 영화롭게 하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될 수 없는 은혜를 두고 우린 모두 아멘, 할 따름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3-5).
오늘 이어지는 시편의 구절구절마다 ‘내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이내 ‘하나님의 이야기’가 된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6).
이 놀라운,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8-9).
이미 우린 이 귀한 은총을 맛보아 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이 모든 게 날 위한 것으로,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0-31).” 우리로 늘 새 힘을 더하시는 날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5-18).
이를 붙들고 주 앞에 서는 날,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이를 우린 삶으로 살아서,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우린 송축할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곧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이 길을 통과하는 동안,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3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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