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들의 몫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들의 보응이니라
이사야 17:14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편 108:13
다메섹에 대한 경고다.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다.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하였다. 곧 아람의 멸망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다. 저들의 침공은 유다의 부패와 타락을 징계하고자 하심이다. 그러나 저들이 침공하였을 때 앗수르가 유다 왕 아하스의 요청으로 출정하여 B. C. 732년에 다메섹을 함락함하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어로 경고하셨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셨다.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1).”
이 한 구절에 하나님의 도움과 역사하심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때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이를 듣고 두려워할 줄 아는 자가 ‘귀 있는 자들’이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11).” 이에 누가 주의 무자비함을 원망할 수 있을까?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요즘 저녁에 같이 나누는 말씀과 아침에 이처럼 묵상하는 말씀이 하나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언어는 성경이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19-20).” 우린 누구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두고 비난할 수 없다. 몰랐다는 말도 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일상의 언어와 같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5).”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2-3).” 곧 그는 말씀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이 말씀은 우리가 쓰는 일상의 언어와 같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 33:9).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결과이다. 말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이 언어는 우리가 쓰는 일상의 언어와 같다. 우리는 주께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구하고 일상에서 서로에게 ‘밥 먹자.’ 하고 말한다. 우린 주 앞에서 주를 찬송하고 주께 감사하는 말을 쓰기도 하고, 돌아서서 하루를 살다 누굴 비난하고 욕하고 헐뜯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우리가 쓰는 언어, 이 말은 주의 것이다. 내 말을 가지고 내가 너희에게 알리겠다고 하신다. 어제도 그에 따른 생각을 하고 그 이상의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며 이단에 사로잡혀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곧 우리의 이성과 상식은 하나님이 거기까지 낮추시며 말씀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을 요구하고 강조하는 종교나 그 교리는 하나님이 언어로 낮아지시기까지 한 그 사랑을 무시하는 일이다. 사이비는 아주 간단하게 그 이상의 것을 말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항상 그 이상의 것을 바라기 때문이고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그래서 하나님은 늘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 그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와 지시와 가르침과 경고를 말씀으로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언어의 세계이고 그 언어는 이성과 상식을 능가하지 않는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39:11).
이를 듣고 알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언어의 세계에서다. 아직 우리의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감추셨다. 하지만 우린 곧 이를 보고 듣고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5).”
나는 오늘도 다메섹에 대한 경고에서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곧 북이스라엘이 당할 철저한 멸망(4-5절)과 그 가운데서도 소수의 ‘남은 자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주를 바라며 섬길 것(6-8절)과 끝내 우상을 숭배한 자들의 멸망을 지적하고 있다(9-11절). 이는 수천 년이 지나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 우리에게 저들의 이야기는 역사이고 비유이다. 하여 구원받을 자들 곧 남은 자들의 은혜는 하나님의 언어를 듣고, 그 말씀을 우리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증거는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데서 확인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어제도 오전에는 장모를 병원에 모시고 갔다 식사를 같이 하고 모셔다 드린 후. 잠시 서성거리듯 거리를 좀 걸었다. 날이 풀리면서 어느 교회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교회로 초대를 했다. 그러다 저만치 두 여자가 정숙하게 서서 무슨 팻말을 곁에 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천 년 왕국이 어떻고 하는 내용으로 언뜻 봐도 ‘여호와 증인’인 것 같았다. 걸음을 돌리며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는 것을 연상하였다. 우리에겐 분별의 영이 필요하고 이는 말씀으로 내 안에 거하신다. 그때에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렘 16:19).”
같은 언어와 사고로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린 어떤 소리를 듣고 어디에 눈길을 주고 사느냐 하는 데서 갈라진다. 우리의 일상 언어는 영적인 언어로 바뀌고, 옛날을 기억하며 그리움에 젖어들곤 하던 마음이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바라는 것. 이는 일상의 언어와 사고가 연단되어 인내로 소망에 이른 줄 앎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여기서 우리가 다른 점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곧 오늘 우리의 언어와 사고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세계의 것으로 연마되는 것, 그리하여 우린 일상의 막돼먹은 언어와 사고의 세계에서 놓여나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 생각을 같이하며 성장한다. 그래서도 성령의 언어는 우리 일상의 언어를 가두거나 밀어내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속에 스며들어 차츰 우리로 하나님의 언어를 알아가고 사용하도록 지도하신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2).
하는 찬송이 미치광이 짓을 하고 살아남기 위해 쓰던 말과 남의 아내를 훔쳐내어 동침하면서 사용하였던 언어가 버려지면서 비로소 올려드리는 말의 세계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2-3, 10).
오늘도 우리가 듣고 사고하고 사용하는 말의 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간다. 아직도 미치광이 짓을 하며 사는 말 속에 살든지, 간음하며 서슴없이 사용하는 말 속에서 살든지…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8).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말을 돌이켜 다시 살려주시기를. 하여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마음을 근신하고 정돈하는 일도 말의 세계로 사유함에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2-13).”
오늘 다메섹의 멸망은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해야 한다.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7).” 이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108:1-2).
그리하여 말의 은사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하였다. 이를 듣고 보고 느끼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의 사고의 범주 안에서만 가능하였다.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마음으로 살아가고 누구와 같이 어울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말은 그 언어의 세계를 달리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3-4).
이를 알기까지,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나의 언어가 쓰이는 이유였다. 어떤 말을 하고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아무렇지 않게 지껄여대는 말의 힘에 있었다. 늘 우리 곁에서 창세전부터 오늘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언어와 나의 말의 세계가 조화를 이루기까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6).
우린 간구한다. 간구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말로 누굴 욕하고 또 원망하기도 한다. 아,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이러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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