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이사야 15:1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시편 106:47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여리고 성에서 빠져나와 그의 딸과 동침하여 얻은 아들 모합의 후예들이다. 혈연적으로 가까운 사이겠으나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는 적국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 종교적 악영향을 끼친 나라다. 다윗의 때에 이스라엘에 귀속되었다가 남북이 갈라지면서 여호람 때에 북이스라엘에서 분리하였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모압의 급작스런 멸망을 예언한다. 국토가 황폐해지고 피난민과 거류민이 재앙을 입는다. 이는 하나님이 죄악에 대해 작정하신 일이었음을 밝힌다.
결국 저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같이 중심에 살지 못하고 주변인들로 살았다. 은혜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항상 그 주변으로 맴도는 이들을 연상하게 한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교회 안에 뿌리를 두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결국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6).”
언제든 우리도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갑작스런 심판이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 여진을 주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 13:35).” 이게 근데 선뜻 와 닿지 않는 것이 어제도 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데서 안일한 것이다. 지금은 늘 적당하여 설마, 하는 마음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닥치기 전까지 누구나 호언장담한다. 죽음조차도 낭만적으로 여길 때가 있다. 이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방심할 때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2).” 회개의 눈물에 소망있다. 후회의 눈물에는 원망만 있다. 오늘 본문은 저들이 ‘통곡’하고, “그들이 각각 머리카락을 밀고 각각 수염을 깎았으며,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2-4).” 여기 어디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바라는 회개가 없다. 회환과 후회만 있을 따름이다. 회개는 주의 마음을 움직이나 후회는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할 따름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곧 회개란 성령이 내 안에서 작동하는 일이고, 후회란 나의 자아인 양심이 스스로 작동하는 일이다. 서로 생겨나는 마음은 닮았지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 9:1).” 곧 회개란 자신을 향할 때 자신도 알 수 없는 죄를 인정하며 주 앞에 세우는 일이고, 남을 향할 때 저를 용서하여 긍휼을 베푸는 일이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1:23).” 우리가 누굴 긍휼히 여긴다 함은 스스로 주께서 더하시는 긍휼을 입었다는 증거가 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이는 주를 사랑하고 그 은혜를 덧입은 만큼의 구실을 한다. 누나는 성도들의 가정 중에 여럿이 무리하여 집들을 장만하다 된서리를 맞는 과정에서 한 가정이 서로 갈라서네 마네, 심한 갈등에 휩싸인 것을 두고 그 남편에서 아내를 용서하기를 자신이 무릎을 꿇어서라도 그러겠다고 하였다. 문득 내 안에 드는 마음은 ‘그 정도까지’ 나는 누굴 위해 긍휼히 여긴 적이 있었나 생각하였다. 말로는 늘 한 영혼을 위한다 하나, 나의 고질적인 거리두기와 무심함은 번번이 더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한다. 하필 그 앞전에 누가 전화를 하였다. 나는 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늘 같은 말의 반복처럼 어떤 일에 마음 아플 뿐이어서 나는 망설이다 진동이 멈추고 한참을 갈등하다 그만두었다. 나의 회피나 무심함은 고질적인 방어기제다.
그렇게 몇 명의 친구나 선생을 마음에 두고 있을 뿐 여전히 나는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다. 누나는 자신이 가서 권유하다 몇 번인들 자신이 무릎을 꿇어 해결될 일이면 기꺼이 그리하겠다고 하였다. 물론 청년 때부터 키우다시피 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신앙을 이어오는 경우이나 상대적으로 나는 누가 배회하다 떠나가면 붙들지 않는다. 때론 나의 이러한 방기가 나를 괴롭게 하는데,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하는 말씀 앞에서 나는 고개를 숙인다.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나 자신을 은밀한 가운데 숨기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나는 주의 종이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종종 이와 같은 묵상글도 가증스럽게 여겨진다. 설교 중에 훅, 하고 이는 부끄러움과 마주할 때도 많다. 누굴 권면하고 위로하다 전하여줄 말씀을 찾는 중에 나의 이중적인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아,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나는 진정 저 한 영혼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그저 마음뿐이고 돌아서면 그게 전부인 것을 가지고 마치 뭐라도 한 줄로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어제 한 전화를 회피하면서 두고두고 그 마음과 씨름하듯 힘들었다. 또 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름 신중하게 애타하며 무슨 말을 권하고 말씀을 나누기도 할 텐데, 그런들? 늘 그게 다여서 다시 통화할 때면 마음부터 상하고는 하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나는 나의 유일한 외투인 회피를 걸치고 외면하는 것이다. 이에,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5-17).”
이를 알면서도 나는 온갖 이유와 핑계로 나를 변호하기에 급급하다. 그때에는 저를 탓하기 일쑤다. 저 때문이다, 하고 거리를 두고 나면 조금은 무거운 마음을 덜 수 있어서이다. 그렇게 몇몇과의 만남도 저들의 연락도 피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하고 절규하는 사도의 애통함이 마음에 닿는다. 그러면서 주 앞에 서는 일이라니…. 머리를 벽에 대고 주 앞에 나의 어쩔 수 없음을 호소한다. 무릎까지 꿇어서라도 대신 용서를 빌고 저들의 사이를 회복시키려 한다는데,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어려웠다. 자주 연락이 오던 사모나 그 내외의 사역에 대하여, 또는 동기 내외의 어떤 안부에 있어서도 나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데 방점을 찍은 듯 한 문장을 매듭지은 마음이다.
여러 차례 같은 말이 오가고 뭐라 일러 한참을 저 때문에 힘에 부칠 정도로 마음을 쏟다 그게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 같은 벽에 부딪쳤을 때에, 순간 멈춤. 더는 다가가지도 먼저 손을 내밀기도 그만두는 것이다. 전에 누가 나더러 참 차다, 하고 경멸하듯 말한 적이 있다. 언젠 그렇듯 뜨거웠던 것이 순간 돌변하여 식은 마음이라… 그 뒤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주저함과 주변을 맴도는 것뿐이다. 더는 그 중심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는 누가 먼저 잘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안고 사는 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성경은 일러,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하면 내가 받은 주의 인자와 긍휼하심에 부끄러울 따름인데,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106:1-2).
나의 됨됨이를 들고 주 앞에 선다. 무거운 마음으로든지 홀가분한 마음으로든지, 부끄러움뿐이든지 기쁨으로든지, 나는 뻔뻔하다고 느낄 정도로 주 앞에 선다. 아침마다 묵상글을 쓰면서도 이 정도만이라도 살기를… 하고 주께 구한다. 주 앞에 나를 내어드리며 있는 모습 그대로 선다는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편함이고 송구함으로밖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시편은 늘 내가 다할 수 없는 찬송을 기도를 살게 한다. 시편으로 사는 일이란,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4-5).
오늘 시편의 서두 부분은 나의 부족함을 대신 아뢰는 듯하다. 시편에서 산다는 일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10).
그야말로 나의 그릇은 한 종지도 못되어서 요즘은 온통 장모의 일로, 그러면서도 저녁에 같이 앉아 예배하고 말씀을 나누는 일로 벅차다. 아이가 출퇴근 때면 전화를 하여 두서없이 하루는 어떠했다고 말할 때 이를 응수하는 일이 고작이지만….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106:8).
오늘 시편에서 나는 다시,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44-46).
이 무궁하신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리며,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47).
나의 분산되는 마음과 어려운 것을 가지고 ‘견고한 심지’를 간구하는 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부디 주 앞에서 주를 바라며 주만 의지하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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