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전봉석 2023. 3. 17. 05:16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
이사야 18:7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편 109:4
 
 
 
구스 땅 에디오피아에 대한 예언이다. 나일 강 상류에 위치한 나라로 유다 왕 히스기야가 왕으로 즉위하던 때인 B. C. 715년에 구스의 25대 왕조 샤바카가 애굽 전역을 664년까지 지배하기도 하였다. 이에 구스는 애굽과 동일시할 수 있다.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할 당시 유다를 도우려 했던 구스 왕인 다르하가는 샤바카의 손자다(왕하 19:7-37:9). 오늘 이사야서의 예언은 구스의 멸망이 아니라 보존하실 것에 대해 다룬다. 저들 사자가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시온산에 이르는 것을 밝히면서 저들에 대한 보존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본문의 첫 표현은 ‘슬프다’는 것이다. 구스에 대한 보존을 기뻐하기보다 저들이 하나님의 보존하심에도 앗수르에 의한 멸망과 그에 따른 파국에서 주변 각국에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 불쌍하기 때문이다. 결국 저들의 끝은 멸망이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더면 모를까, 하나님을 모르고 부정하며 사는 삶의 갈급함에 대하여 이사야의 첫 표현은 슬프다는 것이다.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1).” 곧 하나님을 모르거나 이를 부인하여 사는 사람들의 아등바등 사는 모습의 단적인 예이다. 이때에 사는 게 어쩜 그리도 고단하고 두려운 일이기만 한지. 산다고 열심히 사는데도 사는 일이 고역이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시 50:22).
 
곧,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잠 1:27-30).”
 
이에 따른 삶의 무게는 고스란히 자신들의 몫이다.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레 26:17).” 이런 말을 해도 저들은 듣지 않는다, 도리어 사는 모양이나 그 수고를 두고 저들은 믿는 자들을 조롱한다. 어느 부자인 친구에게 저가 늘 쫓기듯 살면서도 술 없이 외로움을 달랠 수 없고, 그 가족은 와해되고 반목된 지 오래인데 그런들….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을 알게 할 때 자신이 가진 것으로 오히려 거부할 따름이다. 가끔 통화하면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식으로 아무리 많아도 늘 돈 때문에 시달린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오늘의 내가 그때의 나를 생각할 때에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은 그래서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하다. 오늘 2절,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 할 때에 어떤 어려움 앞에서 사방 그 도움을 구하려하나 허사다. 구스는 근동 강한 나라들을 귀합하여 앗수르를 대적하려 안간힘을 쓴다. 서로 동맹하고 대책을 강구하지만 저가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인들….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러는 것이라니!
 
누구는 약국을 몇 개 운영하고 서울대 약학박사 명예도 가졌고 여러 곳에 건물도 가졌으나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사는 게 그저 죽을 맛이라. 저에게 신앙이란 고단한 무게를 하나 더 얹는 꼴 같아서 듣기가 싫다. 그렇다고 말씀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어려서 믿던 기억이 그렇듯 달갑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무슨 말 끝에 꼭 사람에 대한 실망을 교회에서 받은 상처로 일반화한다. 나는 하나님을 말하는데 저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 오늘 시편에서처럼,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109:4).
 
별 수 없다. 백 날 말해도 소용없는 게 선입견이다. 설득하여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는 없다. 성령이 그 안에 감동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애써 전하여도 모두가 공염불일 뿐이다. 구스는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지척에 두고 살았지만 저들의 생활이 그리 와 닿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침공 가운데서도 구원의 은혜로 유다를 도우셨고, 구스에도 은혜를 베푸셨다. 유다를 돌보시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저들은 모른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몰살되고 쫓겨 급거 퇴각함으로 구스는 구사일생 싸워보지도 않고 살아남은 셈이다.
 
이와 같은 은혜, 실은 믿는 자아 곁을 같이 하면서 정작 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덕을 보는 처지의 은총을 저들이 인정할 리는 없다.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사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사 18:3).” 오늘 본문의 한 구절 한 구절에는 그와 같은 숨은 그림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에 우리는 고백하기를,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삼하 22:30).” 그러므로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그러므로 있는 곳 그 주변의 덩달은 은택은 저들 스스로의 수고와 애씀의 결실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향하신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충만하게 하심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0-11).” 이에 묵묵히 주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준행하는 것일 뿐. 하나님은 그렇게 조용히 일하시며 그 열매를 거두신다. 오늘 이사야서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 산의 독수리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던져 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여름을 지내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겨울을 지내리라 하셨음이라(사 18:4-6).”
 
일반은총이라 함은 이와 같이 주를 믿는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택으로 곁을 같이 하는 모든 이들이 덤으로 같이 쬐는 햇볕과 바람과 하루하루의 모든 평안이 그것이었다. 이를 우리는 말씀으로 알고 저들은 알지도 못하고 감사할 줄도 모른다. 그때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실제 저들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 그 이유가 천국이 된다.
 
누가는 이처럼 이야기를 하고 마태는 가르치시는 교훈을, 마가는 설교를 중점으로 복음서는 기록되었다. 누가는 일상의 소소함 가운데 예수가 거니심을 묘사한다. 가벼운 대화가 있고 격이 없는 말씀도 있다. 가령 유다 곁에 사마리아 땅이 있는데 저들은 적국은 아니지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아는 율법에 가려져 예수를 경계하고 저를 따르는 자들을 주시하였다. 실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킬로미터의 거리나 되는데 그 사이에 사마리아 땅이 있었다. 대부분 서로 충돌하기 싫어하여 먼 길을 돌았으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실제 그 충돌은 사마리아 땅에서 강도 만난 갈릴리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요즘 나는 더욱이 장모의 남은여생을 같이하면서 말씀으로밖에 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알았다. 이에 성경을 나누고 전할 때에 주의 영이 해야 할 말을 넣어주시고 들려주심을 느낀다. 곧 그가 말씀하시면 이루어진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33:9).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우리의 참여가 인격적으로 현재 가운데 개입하는 것이고, 가르침은 그 교훈이 우리로 깨달아 삶의 현장으로 내몬다. 그래서 설교는 들을 때 언제나 내게 하는 말씀으로이지 누구 들으라는 말씀은 없다. 가르침의 교훈은 일상으로 확장하며 비유하여 들려줄 수 있는 말씀의 영역이다. 곧 적용이 안 되는 가르침은 뜯어진 주머니 속의 구슬 같다. 사도 마가와 마태의 시선은 그러했다면 누가는 가볍고 격식 없는 대화로 우리를 이끌어 주 앞에 앉힌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말을 하듯 대화는 이어진다. 대화는 스며서 어느새 서로에게 젖는다. 예수님은 항상 말씀하셨다. 바울을 두고 누구는 말쟁이라 하였다. 우린 그렇게 수다스럽다. 오랜만에 통화를 하고 안부를 묻는데도 이런저런 그동안의 사연들이 술술 풀려난다. 성도의 대화는 일상 속의 말씀이다. 살며 사랑하며 느낀 예수를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연애 같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11:4).
 
우리의 삶이란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사 18:7).” 함과 같이 구스는 모르고 하는 일이었다면 우리는 앎으로 그리 행한다. 할 때에 우리는 형편과 사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저들이 알지 못하는 평안은 저들이 갈구하는 건물이나 재산의 유무에 있지 않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109:1-3).
 
저들도 어쩔 수 없는 적대감을 이해한다. 그 거북함도 안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가 말하는 평안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저들이 그 많은 소유 가운데서도 사는 게 고역인 까닭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우린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 말이 객기 같고 미친 소리 같겠지만 정작 저들이 간헐적으로 느끼는 평안은, 유다의 하나님이 앗수르를 멸절하여 쫓겨갈 때 어부지리로 얻은 구스의 승리일 뿐이다. 구스는 환호하나 이는 일시적이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27:6).
 
저들을 설득하거나 돌아서게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7-10).
 
그렇게 될 자들이 우리 곁에는 수두룩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우린 다만 주께 바랄 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네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7:4).” 우린 벌써 결말을 알고 산다.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15-16).
 
오늘 시는 저주의 시가 아니다.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20).
 
정해진 결론을 알고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저들의 핍박도 안타까워한다. 업신여김을 받는 일 따위야 대수로울 게 없다. 일찍이 나는 몰랐던 내 안의 어떤 능력은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은 안목을 실제의 삶에서 겪게 하였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청소년들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 저들이 알지 못하고 누굴 괴롭히고 함부로 괴롭히는 모습을 볼 때면 나의 예전에도 알지 못하고 하였을 누군가를 생각한다. 곧 우린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힘의 논리에 따라 가진 자는 ‘갑’, 못 가진 자는 ‘을’로 놓고 철없는 속단과 경시가 난무하다. 그런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5-17).”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21-22).
 
나는 오늘 시인의 눈물로 주께 구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26).
 
그러할 때에,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3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