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이사야 16:10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43
우리의 분별은 장담할 수 없다. 모압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곧 오늘 우리에게 향하는 말씀 같다.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를 보면서 말로만 듣던 그 이상의 어리석음 앞에 기겁을 한다. 모압은 이스라엘이 분열한 뒤 북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았다. 아합 때부터 북이스라엘의 통치자 앞에 해마다 십만 마리의 양을 조공으로 바쳤다. 오늘 첫 구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복종이면서 신앙의 노선을 바로 하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모압은 어쩌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일까? 저들은 북이스라엘에 붙어 지배를 당하면서 다윗의 왕권 계승인 유다를 적대시하였다. 거짓과 참의 분별이 이처럼 아차, 하는 순간에 갈린다.
‘이 땅의 통치자’는 다윗 왕권의 유다 왕들을 가리키지만 이는 그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를 시온 산으로 보내라 하심을 두고 그리 읽는다.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1).” 곧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 2:1-2)
<나는 신이다>를 보면서 사람들의 갈급함이 어떠한가를 짐작하였다. 이를 각각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분별없는 자 같이 행하는 것을 보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앞서 예수님은 가르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5).” 각 나라 매 시대마다 그런 집단이나 사람들이 있었지만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이에 우리의 분별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저들의 갈급함은 육에 속한 것으로 ‘이 땅의 것들’을 향하여서였다. 어떻게 저런 데 마음이 동요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 저들의 개인적인 사리분별을 생각하였다. 곧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
오늘 본문에서 임박한 파멸을 읽는다. “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사 16:2).” 아르논의 모압과 에돔 사이에 흐르는 강으로 국경지역이다. 새들이 하늘을 날지 못하고 나루에서 떠다닌다.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들이다. 미숙하여 허기진 영혼에 홀리는 것들이 끌림으로 작용한다. 우린 이와 같은 사실을 돌아보며 자신을 돌아보고 곁에 두신 이들을 살펴야 한다. “이미 너를 내 백성 중에 망대와 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렘 6:27).” 주신 바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짬짬이 <나는 신이다> 영상을 보면서 몇 해 전 두 친구가 명절 연휴에 왔던 일이 생각났다. 둘은 어디 보육원 출신으로 한동안 자주 가던 곳에서 만난 사이였다. 그 가운데 한 친구가 교회를 말하고 그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좀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것이 저들 무리였다. 나는 저들이 이단이고 어찌 그러는가, 하고 설명하였고 저는 그때의 만남으로 한동안 토요일마다 찾아와 성경공부를 하였다. 감사하게도 저는 그들 사이에서 ‘이상하다’ 싶었던 것들에 대한 이유를 찾았고, 나는 저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곳의 한 교회를 찾아 그리로 소개하였다. 그러려고 우연처럼 서로 연락이 되어 수십 년 만에 만나게 하셨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의 열심과 수고가 때론 외로움과 상처에 위로로 다가온다. 그것이 좋아 빠져들었던 곳이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2).” 저의 영혼이 다급할 때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어제도 그 영상을 훑어보면서 우리가 임의로 할 수 없는 싸움, 저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말씀과 영적 분별력은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 일상의 소소한 활동반경이 주가 두시는 이치 가운데서 돌아간다. 말도 안 되는 이탈과 요구는 어딘가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오셨고, 성경으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 우리의 이성과 상식은 무시될 게 아니라 분별의 기반이 된다. 어떤 기호나 그림 혹은 소리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면 얼마나 혼잡하고 난잡한 가운데서 감정적으로 휘둘리며 주를 따라야 했을까? 하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말과 문자는 이성과 논리로 상식을 무시할 수 없다. 이를 또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상식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얼토당토않은 비상식적이고 인간이하의 혹은 이상의 것으로 우릴 쥐락펴락하지 않으신다. 우리로 주를 가까이 함으로 복인 것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전혀 말도 안 되는 형이상학적 현상이 아니라, ‘주의 행적’ 그리하여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고 사람과 같이 생활하시다 사람으로 죽으신 주.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84:11).
‘정직하다’, ‘좋은 것을’ 하는 이 땅의 현실적인 문제를 막무가내로 업신여기지 않으신다. 이에 우린 소망을 두고 주신 한 날의 실제적인 삶을 살아간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146:5).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이상한 요구를 막무가내로 강요하지 않으신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곧 삶의 질적인 문제에서 우리는 실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지혜와 상식을 주신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전 7:5-6).”
곧 모든 언어는 사전적 의미와 지시적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어느 하나,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읽어서도 안 되지만 함축적인 의미로 상징적인 뜻만을 내포한다고 해서도 안 된다. 두려운 가운데 말씀을 마주하는 일이란,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그와 같은 현상이 또한 사람들을 황폐하게 하거나 맹신적이게 하거나…
나는 캐나다 출신의 한 홍콩 여신도의 공개적인 고백을 들으며 어떤 안타까움이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공개로든 비공개로든 그때의 일을 돌이켜 자신의 어리석었음을 밝히는 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사 16:12).” 근본적으로 사람을 보고 그 무리를 따르고 속한 자들의 맹신은 마치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9).” 그만큼 절박하고 비상식적인 데서 현실을 구현하려 하는 것이 문제였다.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115:7-8).
사람을 신격화하고, 어떤 현상에 대해 의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사유화하는 모든 해석은 이단과 사이비종교의 특징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는 결코 자신을 우러르지 않는다. 오늘 우리에게 이 시대를 사는 동안 더욱이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아차, 싶을 때 이미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변형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라는 콘텐츠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모든 문화는 사탄을 경배하고 자기의지로 뉴에이지에 가담하게 된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하여 우린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중심에 둔다. 어떤 사람도, 이상도 아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7:1).
이를 행할 수 있는 자는,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2-3).
우린 모두 개개의 어쩔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 주신 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를 도피하거나 다른 무엇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는 그게 무엇이든지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에스라 3:11).” 여기에 어떤 사람을 앞세우고 저를 떠받드는 어떤 행위도 우상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성자를 운운하며 누굴 성인으로 추대하는 따위에 모두 경계한다. 설령 저가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어 수천수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업적으로 남겼다 해도, 바울은 바울일 뿐이다. 다윗은 다윗이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내가 저들 앞에 절하고 저의 이름으로 무얼 구할 것은 없다. 비대해진 교회에서 목사가 높임 받는 현상은 경계대상 1호다. 누구도 예수 이름을 대신할 수 없다.
오늘 시편은 주를 오직 높인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31).
다른 모든 것은 허사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경배의 대상일 수 없다. 존경과 존중 그 이상의 마음은 모두 숭배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그런 영상을 보거나 르포를 읽을 때면 새삼 두려움이 앞선다. 분별이 없는 믿음은 허상을 쫓게 되고, 군중 속에 사로잡히면 쓸려가게 돼 있어, 감정에 치우치고 이성은 마비되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식을 마비시킨다. 하나님은 결코 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한 방법으로 우리와 비인격적인 관계를 바라신 적이 없다. 이에,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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