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이사야 19:19-20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어제 애굽을 구스로 표현하고 오늘은 애굽이라 일컫는데 있어, 18장의 애굽은 구스만 관련하고 19-20장의 애굽은 구스는 물론 그 주변의 애굽화 된 모든 왕조와 관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의지하는 ‘애굽’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알게 한다. 오늘 1절만 봐도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하실 때 신속한 하나님의 개입을 알 수 있다.
그 사회는 급한 혼란과 고통에 빠질 것이고, 나일강이 마르고 경제는 파탄 나고, 타락한 관료들은 백성들을 그릇 인도할 것이다. 애굽의 와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민 유다를 향한 개입이다. 우린 이를 보며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바로 알게 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이는 모두를 향한 경고이나 실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들을 수 있는 자를 향한다. 곧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 118:8-9).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 우리는 홀연히 있을 주의 심판을 대비한다. ‘빠른 구름을 타고’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누가는 예수님의 비유를 기록한다.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눅 12:38-39).” 누가복음을 읽고 있으면 점점 때가 찰 때에 한결 차분하고 여유롭게, 개인적으로 대화하며 이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다그치거나 윽박질러 너무 늦지 말라고 조급해하지 않으신다. 다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신다. 비유는 전달방식이 우회적이다. 속도를 늦추듯 천천히 이해를 도모한다. 우리가 다 아는, 여러 해 겪으며 살았던 익숙한 것으로 빗대어서 알게 하신다. 비유는 완곡어법의 특징이다. 그러다 툭, 던지듯 한 마디 말씀에 발밑의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이 온다.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 이야기도 그렇고, 재판장 이야기나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도 그렇다. 특히 주님은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는 갈릴리에서나 예루살렘에서와 달리 비유로 자주 말씀하셨다.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 주일과 주일 사이 그 한 주간의 삶은 우리의 ‘사마리아’다. 또는 안 믿는 자들의 막말이나 우스꽝스런 조롱에도 별 반응이 없고, 이단과 사이비에 대해서는 아예 무반응한 성도의 경우는 ‘사마리아’에 머무는 동안이다. 가족이나 일터, 사회생활을 하는 데 따른 무력한 태도의 동안이 ‘사마리아’ 지역이다. 그 지역을 지나실 때 예수님은 유독 설교나 가르치심보다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비유는 듣는 이를 끌어들인다. 상상력을 동원해야 알아들을 수 있다. 그 뜻이 ‘~곁에 던져진 무엇’이다. 이게 여기 왜 있지? 하는 의아함. ‘아재개그’ 같은? 비유는 듣는 자의 몫이다. 참여하거나 시큰둥하거나. 말하는 자는 의도를 감추고 시치미까지 뗀다.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정색을 하고 설명을 하면 비유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비유는 항상 모르는 것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다 아는, 익숙하고, 곁에 늘 있던 것으로 소재를 삼는다. 미처 깨닫기 전에 여운이 짙게 남는… 그 의미가 뭐지? 하고 스스로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대화법이다. 종교나 교육의 범주보다 더 넓다. 우리 생활에서 ‘사마리아’는 오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곳이면서, 엄연히 나이면서 내가 왜 그랬지? 하게 되는 무엇이다. 이를 우리가 아는 것은,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4-6).”
듣는 우리로 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면 허사다. 그래서 지혜서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백날 계획을 하면 뭐하나?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가 따로 계신 것을. 우린 이를 알고 인정한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그렇다면 아무리 어떻다 해도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설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그렇다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이 확실한 믿음이 우릴 살린다. 하여 우린 주의 등불이 된다.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말할 것이니라(사 19:12).” 오늘 이사야서는 ‘애굽’ 곧 주의 뜻과 멀어진 우리에게 알리신다.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어지러운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을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며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가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14-15).”
이는 우리로 알게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자주 사마리아에 안주하려 들고 애굽에 머물려 하는 우리의 시절은 지났다. 그러므로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우린 결코 머무는 사람들이 아닌 것을,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다.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습 3:9-10).” 구스, 저 애굽에서 돌이켜 주 앞으로 나아오기까지,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1).” 주를 모른다, 알지 못했다 할 자가 없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오늘이란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계획으로 말미암음이라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리라(사 19:17).” 우린 이를 알고,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19-20).”
곧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우리로 그 사명을 감당하고 등불이 되어 가는 길을 비추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그것이 갈릴리에서든지 예루살렘에서든지 심지어는 사마리아를 지날 때이든지….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107:2-3).
이와 같은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기까지,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눅 1:68-71).”
오늘 이사야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 19:25).” 이를 바울은 이렇게 해석하였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롬 10:20-21).” 이와 같이 나는 말씀을 따라간다. 결코 앞서지 않으려 내 생각을 삼간다. 설교는 창작물이 아니고, 묵상은 감상문이 아니다.
나는 참여자가 된다. 말씀을 먹고 싸고 사는, 나의 이야기로 말씀을 가져온다. 나의 상상력은 ‘비유의 말씀’ 그 범주 안에서 확장한다. 의미를 알게 하시는 이의 의도를 파악한다. 성령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 열어 가신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항상 그러하기를 주의할 따름이다. 오전에 아내가 물었다. 하루 종일 혼자 심심하지 않아? 나는 무심히 말하길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하물며 택시운전사는 종일 차 안에 앉아 차를 몰고, 크레인 위의 작업자는 혼자 좁은 공간에서 활동하고, 주방 일을 하는 이도 종일 주방을 맴돌듯이 나의 하루도 누가 오거나 어떤 이와 통화를 하거나 말씀을 읽거나 설교영상을 찾아보거나… 우린 모두 혼자서 한다. 말을 하거나 들을 때도, 생각을 할 때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거나 혼자 있을 때도 우리의 ‘사마리아’는 때로 거칠고 퉁명스러워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나? 하는 혼란을 줄 때도 있지만!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그래서 예수님은 유독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는 여담처럼 혹은 사사로운 듯 툭, 툭, 비유의 말씀을 하곤 하셨다. 이를 누가는 다른 사도에 비해 사마리아에서의 열 개나 되는 특별한 비유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하고 계심을 주목하게 한다. 나는 더디게 떠듬떠듬 낮 동안에 요즘은 누가복음을 읽는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우리 저마다의 ‘애굽’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이어서 시편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110:1).
하신 한 구절의 대해 속으로 풍덩, 하고 뛰어든다. 마치 “내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 하신 예수의 말씀이 이를 근거로 하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44:5).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는 게 말씀의 세계고 비유의 의도다. 이를 알고 베드로는 자신을 던졌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전적으로 말씀에 뛰어드는 것,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2).
오늘 시인은 주께 전가한다. 그렇게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슥 10:5).” 솔직히 우리가 말씀이 아니면 무엇으로 보증할 것인가? 고작 집문서 한 장에 그것이 자기 것이라 하듯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 우린 주만 믿고 뛰어든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3).
아, 이 아름다운 광경이 날마다 나의 한 날이기를.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4).
더는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어떤 보증이 더 있어야 하나?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때론 그래서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주 앞에 설뿐이다. 재판이 미뤄지든 속개되든… 개척을 하든 못하든… 나는 동생 목사들이 주만 바라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사마리아’를 지나는 길을 응원한다. 격려하고 축복한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5-7).
주가 이 모든 상황도 여건도 심지어는 불리하고 억울한 지경까지도 알아서 책임지실 것임을. 다만 우리는 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그러므로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111: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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