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이사야 21:10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2:1
바벨론에 대한 2차 예언이다. 저들의 멸망이 구체적으로 엘람과 메대의 군사에 의해 이뤄질 것이다. 이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일깨운다.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10).” 우리의 믿음은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이다. 바벨론은 앗수르와 함께 항상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우상으로 이끈 나라다. 말씀이 저들을 지목하고 백 년이 지나지 않아 결국은 사라졌다. 굳건하고 온전한 믿음이란,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단 2:45).”
성경은 참되고 확실하다. 곧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당시 바벨론의 멸망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종말의 때는 예수 오신 날부터 시작되어서 언제라도 주의 재림이 이루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곧 예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해가 어두워지며’ 곧 의의 빛이신 말씀이 이 땅의 거짓들로 어두워져 감추어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곧 그 빛을 받아 발하여야 하는 발광체로의 교회가 점점 세상으로부터 그 권위를 상실하고 있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즉 더는 교회의 말씀이, 이를 전하는 주의 종들이 떨어져나간다. 그리하여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곧 세상은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이끌려가고 하늘의 권능은 야유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안목과 통찰은 성경을 근거로 확실해야 한다. 덩달아 쓸려 다니는 안개와 같이 흩어지고 다시 피어나기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백여 년 후에 있을 바벨론의 멸망을 구체화할 때 누가 이와 같은 말씀에 귀라도 기울였을까? 오늘 이 말씀이 전하여질 때도 앗수르보다 바벨론의 포악은 더 하였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 때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주는 우릴 위하신다.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28).” 이와 같은 경외함이 우리로 바로 보고 옳게 판단할 수 있는 힘을 더한다. 주의 재림은 늘 가까이에 있다. 종말의 때는 오늘일지 혹은 내일일지 우린 알 수 없다. 하나 그 임박한 날을 대비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이 존귀와 영광을 붙들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우린 살아서 사는 동안을 온전히 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포문을 연다.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네겝 회오리바람 같이 몰려왔도다(사 21:1).” 해변 광야란 바벨론이다. 지형적으로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는 바다 같은 강, 나일강을 의미한다. 강과 강 사이 그 광야에 위치한 바벨론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라 일컬어지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고대 세계 4대 문명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번영과 엄청난 부귀영화가 저들로 타락의 기로에 서게 하였다.
바벨론은 세상을 의미한다. 세상은 광야와 같다. 그 가운데 비옥한 땅의 사람들, 저들의 영적 실패는 넘치는 영화에 있다. 그런 저들에게 성경은 외친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세상을 벗하고 살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신다. 둘 다를 소유하고 그 사이에서 신앙을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말씀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곧 말씀은 분명히 하시길,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오늘 이사야의 표현에서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2).” 하는 오늘 본문에서의 ‘혹독한 묵시’가 때론 우리로 갈등하게 한다. 이는 마치 부자 청년이 주를 따르고자 왔다가 자신의 소유가 많아 근심하고 돌아갔던 예와 같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여기서 지혜는 일갈한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가만 보면 가진 것으로 고통 중에 처하는 삶이 수두룩하다.
우리는 이를 보며 안타까움으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해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나를 엄습하였으므로 내가 괴로워서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사 21:3).” 저들이 비록 제 갈 길로 간 것뿐이지만, 예수님도 그와 같은 심정이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우리의 이 어쩔 수 없음이 사회적인 구조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추구하는 바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우리에게 더하신 이와 같은 마음은 주를 바람으로 더욱 온전하여진다.
우리는 이 시대의 파수꾼 같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것을 보고하게 하되(사 21:6).” 잘 살펴 우리 영혼을, 교회와 그 믿는 자들의 역할을 바로 완수해야 한다. 그리하여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겔 33:7).” 우리가 곁의 누구에게 이와 같이 말하고 전하여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이미 너를 내 백성 중에 망대와 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렘 6:27).”
주신 날 동안의 우리 사명은 어느 거창한 구호나 원대한 목표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로 하나님의 언어를 나타내고 실현하는 것. 주어지는 한 날 한 날의 연장이 다 뜻이 있고 목적이 있는 시간인 것을. 이에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하물며 저 악한 헤롯도 그러한데 우리 믿는 자로 그 삶의 온전함이란,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115:1).
행여 그 영광을 가로채듯 살고 있지는 않는지? 오늘 주신 건강과 평안을 마치 마땅하다는 듯 소유권을 행사하고 살지는 않는지?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사 21:10).”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을 주의 백성에게 알리시고 세상이 다 알게 하신다. 이를 위하여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혹여 오늘 내게 두시는 어려움이 그러한 것이라면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이 복이었다. 이어지는 두마에 대한 경고다. 두마는 ‘완전한 침묵’이란 뜻이다. 에돔의 한 성읍이었다.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11).” 곧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는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이다. 그러기까지 오늘도 참고 기다리신다. 그리하여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러니 오늘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드단 대상들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하리라(사 21:13).” 드단 대상들은 아브라함 후처인 구스족 출신의 그두라의 자손이다.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창 25:3).” 드단은 아라비아 남부 중앙에 거주하며 북부와 베니게 항구까지 왕래하는 거상이었다. “드단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말을 탈 때 까는 천을 너와 거래하였도다(겔 27:20).” 저들이 아라비아 수풀에 유숙하였다 하는 것은 저들의 경제적 부유함이 교만이 되었고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다. 오늘 우리의 적당함이나 그 이상의 안락함이 우리로 영적 게으름에 젖게 한다.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달리지 말라고 성경은 경고하였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이를 쉽게 다시 읽는다면 그런 소리다. 가질 거 다 가지고, 남들처럼 누리면서 무슨 경주를 하겠나? 운동선수도 자신의 경주에 맞게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데, 하물며….
이러므로 우리에게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저들 믿음의 선친들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렸다. 어떤 책임감이 때론 우리를 붙든다. 자식 일에 또는 사랑하는 이의 삶에 너무 밀착하여 스스로 힘들다. 이 얽매이기 쉬운 것은 집착이며 자기 고집이다. 다시 말하면 죄다. 우리로 달릴 때 무겁고 거추장스런 외투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눅 9:3-4).”
나는 아내의 수고를 안다. 고맙고 때론 안쓰럽다. 더욱이 친정엄마와 같이 살면서 늙으신 모친을 돌보는 데 있어 너무 깊이 자주 자신이 다 감당할 수도 없는 부분까지 개입을 한다. 원래 그런 성향이라 그래서 깔끔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여 균형있게 하려는 것은 좋은데, 그러느라 너무 자신이 힘들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그렇고 살림을 하고 모든 것을 건사하는 데 있어서도, 별 수 없다. 그러느라 항상 너무 많은 책임을 진다. 그러지 말라 이르지만 저도 그게 어려운 것인데, 이는 단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죄이기도 하다. 미덥지가 않은 것이다. 늙으신 친정엄마를 모시면서 그 수고가 더욱 지나치다.
그런 식으로 우린 우리에게 맡기신 이상의 것을 짊어지고 뛴다. 여기서 성경은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라’고 한다. 설령 미덥지 않음을 인내하고, 속 터지는 일에 대해 인내하고… 그러한 인내는 주께 맡김으로 훌훌 벗어나야 하는 외투들인데… 것도 자신의 수고와 애씀의 땀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달리려고 하니 그 걸음이 항상 고단할 수밖에! 성경은 이에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께서는 언제든지 그러하실 수 있었음을,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눅 9:5).” 우린 다만 맡기신 데서 그 사명을 다할 뿐이다. 곧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것이 성경의 주장이다(히 12:2).
이에,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2:1).
그의 계명 곧 그 말씀을 크게 즐거워함은 하나님의 언어로 우리의 일상 언어를 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세상 사람들이 다들 어떻게 산다 해도,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우리로 알게 하시길 원하신다. 하여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1:2-3).
이 복은,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133:3).
우리가 누릴 복은 고작 이 땅의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이를 위하여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4-5).” 이를 붙들고 살 때,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112:2).
그러므로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8).
우린 이 땅의 결국을 볼 것이다. 저들이 붙들고 끝내 놓지 않으려 했던 것들의 허망함을. 그리하여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이에,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1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로에 관한 경고라 (0) | 2023.03.22 |
---|---|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0) | 2023.03.21 |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0) | 2023.03.19 |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0) | 2023.03.18 |
나는 기도할 뿐이라 (0) | 2023.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