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
이사야 22:23-24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시편 113:4
예루살렘을 타락하게 한 두 관료에 대한 경고이다. 흥청거리고 허망함에 빠진 예루살렘으로 선지자는 애끓는다. 여호와가 일으키신 엘람과 기르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앙망하지 못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권고를 무시한다. 이때의 두 관료는 히스기야 시대의 사람이다. 당시 히스기야 때는 회개하고 주의 구원을 받았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예루살렘의 이와 같은 도태와 타락은 이미 예견된 멸망의 길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전에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 타락하여 최후의 경고를 받았다.
오늘 본문은 열방에 관한 심판의 경고에서 하나님의 백성 또한 죄 가운데 있으면 그와 같이 심판을 받을 것임을 알게 한다. 훗날 바울 사도의 경고처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 모든 심판의 예언은 듣는 이를 위한 곧 예정하시고 택정하사 부르심을 받은 주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자들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주목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이었을 텐데 이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 저들에게는 특징이 있다.
먼저는 배교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살후 2:7).” 이를 불법의 비밀 활동으로 보았다. 또는 실족하는 사람이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0-12).” 실족하면 서로 미워하게 된다. 이를 충동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미혹한다. 결국 저들도 불법한 활동, 배교하여 그 안에 주의 사랑이 식는다.
결국은 이로써 신앙의 항로에서 파선하는 사람들, “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저들 안의 양심, 곧 주 앞으로 인도하였던 양심을 저버리고 이내 파선하였다. 이를 배반이라 하였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습 1:6).”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자신을 정당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짓밟는 사람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그런 저들은 결국 ‘우리에게서 나갔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이를 예수님은 ‘버려진 가지’처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이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이는 곧 버림당하는 것으로 바울은 두려워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즉 귀를 돌려 진리에서 돌이키는 사람들로 언제든지 우리도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 수 있음을,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4).” 그러다 결국 주를 부인하는 사람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천하의 바울도 그러할까 하여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다는 데서 일일이 이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보았다. 자신을 믿고 절대 아니라고 장담하는 사람들은 아차, 싶을 때 곁길로 간다. 사람은 본성이 빛보다 어둠을 좋아한다.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경향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결국 자신들은 부정하나 자신들도 아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악한 행위’를 우린 일삼으며 산다. 이에 따른 이유가 있었다.
먼저는 각종 염려와 근심 때문인데 이는 다 돈 때문이었다. 마치 가시떨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같아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 8:14).” 말씀을 듣고 싹이 나고 가지가 자라는가 했더니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대한 갈망이 얼키설키 가시떨기처럼 저를 두르고 있다.
다음은 세상을 사랑하여 같은 동역자로 살다 이내 같은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대표되는 데마는 마가와 누가와 같이 주의 사역자였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 1:24).” 한데 저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이는 남 이야기 같지 않다. 개척교회니 단독목회를 한다는 게 점점 어렵고 궁핍한 시절이다. 기생하듯 큰 교회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하며 근근히 견디든가 해야지, 목사로서 두 개 세 개의 일을 뛰며 그 사명을 다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결국 주객이 전도되어 목회는 뒷전이고 사는 일에 급급하다 이내 세상으로 돌아가는….
더 나아가 양심을 버리는 목회자도 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8-19).” 한데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20).” 저들을 가리켜 사탄에게 내 준 사람들이라 한다. 세상으로 간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와 결탁하여 정치화되고 각종 이권다툼에 함몰되어 주의 부르심을 망각한 사람들….
또한 신앙을 유산을 잃고 여러 더 급한 것(?)에 얽매인 사람들도 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예수를 알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였다가 다시 얽매이면서 처음보다 더 완고하여진 사람들, 곧 의의 도를 알지만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 사람들이 실은 무섭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찾아보다 스쳐가는 누구를 생각한다. 나 또한 그들과 같았고 함께 어울려 더는 돌아올 수 없을 줄 알았던 기억들도 난다. 죄의 유혹으로 더욱 완고하여지면 처음부터 예수를 몰랐던 사람보다 더 무섭게 바뀐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2-14)”
이와 같은 성경의 권고와 경고와 예언의 말씀이 누굴 향하는 것인가? 안 믿는 자는 아예 듣지도 않지만 들어도 별 감흥이 없다. 오늘 본문은 여러 열방, 이방인들을 향한 심판의 예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 유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의 말씀이다. 주는 주의 자녀들을 향하여 참고 또 참아 기다리신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민 14:18).”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무섭고 떨려야 한다. 이것이 들을 수 있는 자의 올바른 반응이다. 그저 그런가보다 한다거나 나는 예외라 하는 사람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아니면 바울이 이상했거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은혜가 크다 하여 죄를 허용하며 살 것인가?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자칫 ‘지붕 위에 올라간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오늘 본문 1절,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당시 지붕에서 저들은 기도도 하지만 휴식이나 잔치도 하였다. 이어지는 말씀으로 보면 저들은 지붕 위에서 잔치를 벌이며 자신들의 참상에 둔감하였음을 알 수 있다(2-13). 이는 어찜인가?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13).”
흔히들 술 자리에서 하는 말, 먹고 죽자! 하는 짓거리와 같다. 신앙은 절박함을 잃으면 소원하고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당장의 문제에 연연하여 병 낫기만을 바라고, 어려운 형편이 나아지기만을 바라고, 자신의 문제에 전념하느라 정작 그 일을 도모하시고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비껴난다. 주의 뜻은 안중에도 없다. 누가 어떻게 해서 낫다더라, 어디가 좋다더라, 요즘은 무엇이 대세라더라 하는 소리에 기웃거리며 쓸려다니다 배교한다. 파선은 남의 일이 아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눅 12:2).” 두려워할 줄 아는 성도가 옳다. 다윗은 늘 주 앞에 엎드렸고, 바울은 그 넓은 경지에 이르러서도 자신을 겸손히 하려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켰다.
‘겸손은 다가가면 수줍어서 숨는다.’ 스스로 겸손하다 할 때 이미 저의 겸손은 경솔하여져서 가짜다. 겸손이 거울이 비칠 때 우월감과 다를 게 없는 자부심이 된다. 스스로를 일컬어 이만하면 됐지, 하는 신앙은 가짜다. 할 거 다 했다 하는 순간 저는 헛것을 붙들고 있었던 게 된다. 겸손은 문맥 사이의 단어 같다. 단어가 문맥에서 나오면 그 뜻을 잃는 것과 같다. 세례요한의 놀라운 고백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저는 다만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하였다. 소리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모양도 없다. 여운만 남을 뿐, 그것도 소리의 것이 아니라 들은 이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8-19).”
꾸며낸 겸손, 누가 알아줄 때 우쭐하는 어떤 마음. 빛도 없이 묵묵히 한 길 가는 순례자가 귀한 시절이다. 내로라하는 목회자들을 보면 어쩜 그리도 자신들의 목회 인생에 자부심이 강한지!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무서워한다. 저의 겸손은 어떤 교만보다 악하다.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하나로 놓은 까닭은 우린 본래 과장하는 족속이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기제가 무의식적으로 발동한다. 거짓 웃음, 친절한 타인으로 돌아서기 무섭게 얼굴색이 바뀌는 사람들, 그러므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139:7-8).
이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오금이 저린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행여 누가 나를 그래도 좀 나은 사람으로 볼까 하여 두렵다. 저가 내 속을 안다면 역겨워서 더는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을…. 이는 과장이 아니다. 바울이 좀 과한 것일까?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날마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아서 거짓 겸손을 꾸미고 그럴듯한 말로 순간 표정이나 말투도 거짓되기 십상인데….
아, 나로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사 22:23-24).” 내 안의 믿음이 혹은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단단히 박힌 못 같아서 더는 빼도 박도 못하는, 그리하여 나의 후손들과 그 무엇도 종지부터 항아리까지 어느 것 하나 쓸모없이 버려지지 않기를….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113:1-3).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더는 돌이켜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비록 별 볼 일 없는 교회로, 그저 한 영혼… 어쩌면 저로 인하여 나 하나 주 앞에 바로 선 게 고작이라 해도. 부디 거울에 비치는 겸손이 아니 되기를. 그러하여 내 길이 행여 자부심으로 나를 숭배하는 게 아니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계 7:9-12).”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5-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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