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두로에 관한 경고라

전봉석 2023. 3. 22. 04:59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이사야 23: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시편 114:1-2
 
 
 
열방 가운데 열 번째로 두로에 관한 예언이다. 해상무역으로 부강한 두로가 하루아침에 그 모든 누림을 잃을 것이다. 부와 영화로 교만하여져 하나님이 작정하셨다. 갈대아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사실과 같이 두로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할 것을 경고한다. 두로는 팔레스타인의 대표적인 도시국가로 페니키아로 알려져 있다. 다윗 때부터 이스라엘과 연관이 있다. 솔로몬 시대에 성전건축을 하는데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하나 각종 우상숭배와 교만의 부패가 스스로의 멸망을 자초한 셈이다. B. C. 664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함으로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졌다.
 
아무리 부강하고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그 쓰임을 다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숭배로 부패하여질 때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1).” 하고 오늘 분문은 시작한다. 예언은 완료형으로 주어진다. 다시스의 배들이 두로에 입항하여 무역을 이루었다. 다시스로 가는 배들이 슬피 부르짖으라 한다. 이 소식이 깃딤 땅에 전파될 것이다. 깃딤 항구는 두로에서 다시스로 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육지와 두로 사이는 물살이 거세었다. 그 자체로 두로는 천혜의 요충지여서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거의 없었다. 항해술이 발달하였고, 부를 많이 축적하였다. 다시스나 깃딤은 두로가 부를 통해 차지한 식민지였다.
 
좋은 조건, 놀라운 부와 명예가 이처럼 일시적인 것을. 참된 평안은 풍요로운 조건에 의한 게 아님을. 세상의 좋은 조건이 오히려 부패하게 하고 각종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것임을. 두로는 함축적으로 알게 한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이는 순식간의 일이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 49:6-8).
 
그러한 것을 두고 우린 얼마나 기를 쓰고 살고 있는지.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9-10).”
 
이 허망함에 대하여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 22:1).”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1-22).” 이러한 말씀을 자주 접하면서도 소유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그 모든 자랑이 한순간의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을 텐데도,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 11:4).” 하여,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52:7-8).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 축적하고 사는 것이 그 입김의 무게만도 못한 것을 알기 때문이라,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62:9-10).
 
그러려면 우리에겐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힘인 것을.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10).” 이 말씀이 내 것이 되기를. 오늘, 이 날은 매일 주의 성일이니, 무엇보다 근심하지 말고, 여호와 인하여 기뻐하고, 여호와를 나의 힘으로 삼고 사는 일. 우리 기쁨의 핵심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저는 누구신가? 태초부터 말씀이셨고, 말씀으로 오셨고, 말씀으로 오늘 우리 가운데 계신 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항상 셋이 함께 하셨다. 저가 이르신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이는 곧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아버지는 아들을 기뻐하시고 아들은 저를 믿음으로 한 형제가 된 우리로 기뻐하신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35:10).” 그것이 오늘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하여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55:12-13).” 곧 오늘 우리의 기쁨은 이와 같이 두로를 향한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새삼 다시 돌아보며 감사하게 된다.
 
매일 나는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면서, 이번 시편 126편에서는 ‘우리의 이 기쁨'은 현재형이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26:3).
 
동시에 과거에도 있었고,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1-2).
 
이 기쁨은 미래에도 있을 것이란 사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4-6).
 
나는 시편 126편 전문을 들어오며 나가며 읽고, 그때마다 나의 현재와 예전 과거와 앞으로의 미래를 두고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이 기쁨은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이란 것도 말이다. 곧 이 결과는 성령의 열매 두 번째로, 희락을 얻는 것과 같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 기쁨은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결과다. 현재의 기쁨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에 있었고 있을 것이다. 기쁨을 느끼는 순간 과거가 되고 그 기쁨은 미래의 것으로 소망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 놀라운 신비의 기쁨은 근거가 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1-2).” 내가 겪었던 날들이 그 증거다. 저는 반석이시고 바위이시었다.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2-3).”
 
이 기쁨은 또한 우리의 앞날에 따른 위로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 40:1-2).” 이는 주가 함께 하심으로 가능하였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43:2-7).”
 
근거로 찾아보는 이와 같은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기쁨은 더욱 견고하여진다. 그 어떤 부귀와 영화보다,  혹은 지금 누리고 있을 어떤 그 만족함보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사 52:7-8).” 이와 같이 시인도 표현하기를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우리는 기쁘도다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편 중에서)
 
하는 찬송에 밑줄을 긋고 또 옮겨 적으며 다시 소리 내어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듯이 오물거렸다. 기쁨에 찬 기대, 미래에 있을 소망, 결국 우리의 이 기쁨은 소망을 먹고 자라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26:3).
 
이는,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이치처럼 말씀은 기쁨으로 확장하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4-5).”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주께 아룀으로 가능하였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이를 일찍이 욥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는 무작위로 메모를 하고, 찾아 읽다 서로 연관이 되어 확장하는 성경의 세계를 사랑한다. 내게 더하신 어떤 우울감까지도 오히려 나로 하여금 말씀 앞으로 오게 한다. 실은 지난주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이런저런 위험신호가 감지된 것이야 그렇다 치고, 나는 어느 항목에서 ‘우울증’이란 진단이 내려진 것에 잠시 눈길을 두었다. 몇 개 안 되는 항목에 있는 그대로 나는 좋다고 한 것인데, 그와 같은 진단에 다소 의아하긴 하였다. 물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나의 가난이 혹은 육신의 연약함이 심지어 우울증까지도 나로 말씀을 사모하며 이를 통하여 나의 나 된 것을 개간하고 솎아내며 말씀으로 더욱 갈아엎어 의지하게 하시려는 것을 사랑한다. 굳이 낫고자 애쓰지 않는 것도 그 한 이유다. 건강이나 우울이니 그 어떤 것도 주신 이의 뜻을 따라 순응함으로 감사하다. 물론 몸을 잘 돌보고 주신 날을 사랑해야지. 하지만 그것이 이 땅에서의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순간 들쑤시는 어떤 외로움 혹은 알 수 없는 공허감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그 또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신호가 된다. 허락하신 날동안, 오늘 본문 부강한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나의 이러한 약함을 오히려 더 귀중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곧 바울의 참 아름다운 고백으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는 말씀을 나는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오늘 시편은 그 말씀 그대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114:1-2).
 
이 놀라운 과거에 누렸던 기쁨이,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3-6)
 
현실의 비현실적인 기쁨을 알게 하고,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7-8).
 
하는 이 확실한 사실 앞에서 오늘 시편은 있는 그대로, 우리 기쁨의 핵심이 결국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사는 일이라는 사실,  그로 인하여 겸손하고 겸허하게 이 모든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며 하루하루 나아가는 길.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 2:21-23).” 그러므로 이 땅의 부와 명예와 그 어떤 만족함으로 누릴 수 없는 기쁨은 한계가 있다. 고작 그것이 한줌 모래 정도도 안 될 인생일 따름이라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3:12-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