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이사야 24: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115:11
‘작은 묵시록’이라 하여 이사야서 속에 여호와의 종말론적 심팜을 담고 있다. 24장부터 27장까지에서 심판과 메시아의 승리를 예언한다. 말세의 대 환란과 온 땅이 황폐화 될 것을 알린다. 앞서 1-3절에서는 온 땅의 지각변동과 4-5절은 황무해진 땅에서 우리가 언약을 파괴하는 것을 지적한다. 6-12절은 우리가 말씀을 위배하면서 생겨나는 참변과 13절 이후 하나님께서 황폐해진 곳에 남게 될 사람들에 대해 밝힌다.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1).” 하고 시작하는 오늘 본문이 창세기 1장에 나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하시던 때를 연상하게 한다. 곧 하나님의 통치가 가려질 때 그 혼란과 공허함에 대하여 두려움이 인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습 3:8).”
이에 따른 말씀으로 이단이 득세하고 사이비가 판을 치다보니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이 와 닿지 못한다. 사람들의 외면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우린 이를 기다리면서 또한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심판은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오늘 본문 2절,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이는 모두에게 적용된다. 곧 우리에게 있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를 묵묵히 준비하며 그 너머의 소망을 붙들고 사는 것이 온전한 신앙이겠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현실의 파고 속에서도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전 3:17-18).” 우린 이와 같은 말씀에서 우리의 신분과 그 처지를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한 날의 수고는 그 날로 족한 것을. 나는 날마다 실망하다 또한 주 앞에 붙들려 살기를 원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현상을 분별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그 신앙의 온전함을 잃지 않으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 하물며 미물의 짐승들도 어떤 경고를 감지하고 때를 따라 자신을 돌보는데 하물며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신이 속아 태평하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종말의 때는 시작되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그러할 때 우릴 두렵게 하는 말씀 한 구절이 있는데,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우린 이와 같은 현실에서 산다. 교인은 많은데 신자는 적고, 신자는 많은 것 같은데 성도의 수는 점점 줄어서… 좋을 때 좋은 거야 누구라도 못할까? 정작 어떤 위기 혹은 이를 망각하고 즐거움에 사무칠 때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이 허다하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자랐다. 싫든 좋든 어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교회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늘어날 때도 혹은 그 많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줄어들 때도 보면 그게 때가 돼 봐야 한다. 어려울 때든지 좋을 때든지 사람들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은 마치 조수간만의 차이와 같아서, 어려서도 나는 사람을 그리 믿지 못하였다. 좋을 땐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던 이가 어느 순간 앞장서서 적이 되거나 원수가 되는 것을 늘 보았다.
때가 차면 안다. 하여 성경은 당부하길,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어쩌면 내 안의 어떤 허무주의 같은 마음이 없지 않아 사람을 경계하는 것일지도.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은 때로 맹목적이어야 가능하다. 주고 또 받기를 원할 때 늘 상처가 났다. 사람을 의지하면 배신이 따랐다. 저들을 아끼고 사랑하되 거기까지다. 내가 저들을 구원할 수 없고 한 뼘도 그 영혼을 성장시킬 수 없다. 하면 할수록 주를 바라는 이유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가족까지도 다르지 않다. 서로에게는 실망뿐이다. 사람을 보며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
잠깐 뉴스를 보다 넷플릭스에 다큐로 나온 어느 목사의 성추행과 그 실태를 보며 민망하였다. 더 마음이 쓰인 것은 그럼에도 저를 신격화하는 사람들이 맹신적으로 따른다는 것이다. 저를 하나님으로 아는 경우다. 성경이 언성을 높인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안 믿는 이들은 그래서 교회를 혐오스러워하고 신앙과 종교를 싸잡아 혀를 찬다. 믿는 자들은 그래서 더 끼리끼리 뭉치듯 자신들은 안 그럴 줄로 안다. 오늘 본문은 일갈하기를,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11).” 모든 즐거움은 사라질 것이다. “성읍이 황무하고 성문이 파괴되었느니라(12).” 우리가 모이던 교회는 점점 사교화되고 사람들은 저들끼리의 복음으로 폐쇄적이 된다.
결국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 5:10-11).” 너는 무얼 하고 있는가? 하고 물을 때 나는 대답할 말이 없어 오히려 감사하다. 누구는 교회를 좀 부흥케 하기 위해 어떤 학원처럼 운영을 한다. 또 어떤 이는 사교적으로 분위기나 예배까지도 가벼이 두고 사람들의 기호를 좇는다. 누군 점점 더 정치꾼이 되어 교단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교인의 숫자가 곧 그 사람의 세력이 되어 행세한다.
성경은 이르시길,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우리가 부르고 찾고 두드려야 할 이는,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사 24:14-15).” 오늘 본문은 오늘의 실태를 이미 다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대상 16:8-9).”
우리에 두신 사명은 하나다. 사람이 먼저가 아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먼저일 수 없다. 아니면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16).” 배신에 배신은 더해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혐오만이 남았다. 하여,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시 69:30).
누가 물으면 나는 그저 하나님께 되묻는다. 그리고 말씀 앞에 앉는다. 나는 나로 늘 싸우고 주 앞에 아뢴다. 세상에서 제일 다루기 어려운 성도는 나다. 남에게 뭐라 이르고 전하기는 쉬우나 내가 주 앞에 온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오늘 우리 주님은 이 세대의 여러 난다 긴다 하는 교회를 보시고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우리 눈에 숨겨진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다. 사느라 사는 데 급급하고, 사람들처럼 여느 교회들처럼 사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고 여길 때,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96:13).
이를 늘 묵상하며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나는 어느 목사의 비리나 파행이 뉴스에 보도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으시는 데 대해 화가 난다. 자신이 자신의 목회를 하고자 하는 동기나 누구를 마주할 때면 주의 일을 한다면서 자신의 일을 하려는가, 되묻고 싶은 것을 참는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체 무얼 믿고 산다는 것인지… 어쩌면 우린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온갖 잡신과 다를 바 없는 신(神) 하나 정도를 더 추가하고 믿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장모와 성경공부를 할 때 자주 성경 한두 구절을 열 번씩 옮겨 적으시라, 숙제를 내준다. 몸에 밴 습성은 무서워서 평생을 여러 신들을 섬기며 살았던 터라, 저의 마음에 혹은 몸에 밴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도 은혜는 기복적이고 축복은 모든 게 형통하길 바라는 것이라… 나는 사후생을 주목하게 하려 안간힘을 쓴다. 우리가 바라는 것,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하여,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107:30).
그러므로,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115:1).
오늘 시편의 기도를 읊조리며 아뢴다. 우리의 아둔함은 주가 아시오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은혜는 불가항력적이어서 나의 그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도 얻은 게 아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
다른 그 어떤 축복도 형통함도 세상 그 무엇도 이에 자랑할 수 없음은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러하였던 나여서 나는 주 앞에 속수무책이다. 아무 것도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다. 다만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12-13).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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