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사야 26:3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1-2
구원받은 자들의 노래다. 구원의 성에서 영원히 안전하고 평안할 의인에 대하여, 그 신앙의 노래다. 심판을 통해 공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 이에 악인들이 당할 수치와 의인의 구원을 이루심이 대조된다. 결국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의 나라를 확장하실 것이다. 해산하는 여인처럼 우리의 구원을 이루심에 대하여…. 오늘 이사야서는 우리로 가장 기본적인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주가 부르신 자녀에 대하여는 세상 그 무엇도 해할 수 없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1).” 하나님이 멸하시고 조성하는 ‘견고한 성읍’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 18:2-3).
성경의 성도들은 한 마음으로 주를 찬송한다. 찬송하게 하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우리의 이 정한 이치에 따른 구원의 길은 결코 변함이 없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우린 어떤 상황에서도 이 믿음 지키려고,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사 26:2).” 그러므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3).” 하는 말씀 앞에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는다. 여러 이유에서 세상으로 가버리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저의 어쩔 수 없음은 이 땅에서 모두 이해는 간다.
하지만 우리의 이해가 구원의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에 따른 가장 큰 난제가 있다. 우리의 ‘~위하여’는 가장 무서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독재자나 나라를 팔아먹은 부패한 정치인들도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위하여’, ‘국민을 위하여’ 그러하였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그러하고, 서로는 ‘사랑해서’ 그러하다. 모든 ‘위하여’는 그와 같이 자기 본위에서 이루어질 때 폭력적이고 자학적이다.
오랜 시간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그 부모를 상대하며 느끼는 것은 저마다의 ‘위하여’가 결국은 상대를 고통 중에 거하게 하고, 자신을 더욱 완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의 신앙도 우리가 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그와 같이 주신 데에 충일하는 것일 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우린 다만 주를 굳게 잡을 것이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우리 심지가 견고하다는 것, 나는 이와 같은 표현 앞에 가만히 선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나는 주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만 신뢰할 뿐 모든 것은 주가 하실 거였다. 이는 곧 그리하여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오직 ‘~을 위하여’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만유의 주가 만물 위에 부으실 수 있는 저만의 특권이 된다. 그 외에 우리의 ‘위하여’는 서로에게 고통일 뿐이어서,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오늘 말씀은 정해진 답을 한사코 외면하는 우리의 그릇됨을 붙드신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히 13:9).” 그러므로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62:8).
주가 아니시면 나는 나조차 내게 가장 어려운 문제인 것을 고백한다. 나는 나의 병듦과 연약함과 죽음을 놓고 자주 기도하게 된다. 나는 나의 부모와 내 곁의 사람들을 위하여도, 사는 일에서보다 죽는 일에서 주의 은혜로 평안하시기를 기도한다. 죽음과 고통 앞에 고약하게 굴지 않기를, 행여 주를 욕되게 하지 않기를… 바울은 늙고 병들어 죽기까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우린 모두 저마다의 ‘위하여’를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나무처럼 마구 휘젓는다. 그것으로 자식을 찌르고 부모를 아프게도 한다.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 나는 요즘 새삼 장모와 지내면서도 저에게 전하는 말씀에서 내가 주께 바라는 게 많아졌다. 살아서 사는 동안의 일이야 행여 돌이켜 미안함을 호소하고 회개라도 할 수 있다 해도 저마다의 완고함을 바울은 자신을 두고 잘 알고 있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아, 저의 날마다 죽는 자신을 나를 사랑한다. 나로 날마다 죽어야 하는 나만의 ‘위하여’를 나는 꺾어낸다. 뭐라 해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더 잘 안다. 하면 이를 인정하는 것, 거기에서는 주를 견고하게 의뢰하는 마음만이 필요하였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사 26:7).”
정직함, 세상 그 어떤 용기보다 용기가 있어야 할 지점에서 주를 의뢰한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는 일이다. 나를 죽여 주 앞에 내어놓는 일이다. 우리 안에 사탄이 거한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마음을 찾아 사탄은 전에 보다 더 많은 무리를 이끌고 들어찬다.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 8:12).” 우리 마음이 어쩜 그리도 길가를 떠도는 것인지.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사 26:11).”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언제나 오늘의 일이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에 우린 날마다 매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아차, 할 때 순식간이었다. 나이가 이쯤 들고 이제 늙지도 젊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에서 보니 위로나 아래로나 모든 인생은 그때마다 함정이 있었다. 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가 날 위하여…’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사 26:12).” 주가 아니시면 그 어떤 우리의 ‘위하여’는 모두 허사다. 거짓되고 위선되다. 그러므로 주께 바라는 것,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29:11).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72:2).
궁극적으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사 26:13).” 오늘 이 신앙으로만이 이 길을 완주할 수 있었다. 어떤 일로 마음을 쓰다보면 그게 나 자신인 것을 마주하게 된다. 누구의 이런저런 일을 두고 씨름하다보면 내가 그러하였음을 자백하게 된다. 요즘 자주 머물 게 되는 지점은 주 앞에 나의 고백이었는데,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15).” 주가 하셨으니 주가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 그리하여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2:27-28).
주가 나의 주재이심을.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117:1-2).
오늘 시편이 그 모든 신앙의 함수를 정의하고 있다.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 주가 정하신 단 하나의 뜻이었음을.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하시는 말씀 앞에 두 손을 들 수 있다면…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주가 주신 날을 바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 앞에 가는 그 날을 온전히 위하여 준비하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곧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 4:31).” 아니면 우리가 무엇으로 견고한 의뢰가 가능할까?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78:38-3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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