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편 119:47-48(17-48)
아리엘, 곧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다. 저들이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진 것과 하나님의 징계가 갑자기 임할 것을 예언한다. 유다의 영적타락은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이를 무시한 것과 외식함과 관습에 따른 신앙의 형식주의가 문제다. 이방나라와 동맹을 맺고 하나님이 모르신다 하여 무시한 것이다. 이에 천대받고 멸시받는 자들로부터 축복의 예언을 회복하고, 겸손하고 빈핍한 자들을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 선민의 신앙적 축복은 영원하고 보편적이다.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리며 구원에 이를 것을 알린다.
우리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는 기만행위는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한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1-2).” 오늘 본문은 그 괴로움에 대하여, 여기서 아리엘은 ‘다윗이 친 성읍’이라 표현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한 데 따른 또 다른 지칭이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중심이다. 해마다 절기가 돌아온다. 형식적으로 이를 지킬 따름이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할 수 없다.
‘슬픈 아리엘’ 거짓예배와 형식적인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우리 교회에도 팽창하는지… 그래서도 나는 교회 안에서 서로 정치적인 논쟁이나 이념논리를 배제한다. 다단계 등 사업적인 구상을 서로 꾀하지 못하게 한다. 이를 전제로 교회를 다니는 무리가 적지 않다. 자신을 알리려고 혹은 이를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데 시선을 두는 사업적인 구상이 교회를 좀먹게 한다. 정해진 공적 예배는 많아서 그때마다 이를 이벤트화 하는 경우나 형식주의적으로 아니면 사업적으로 활용하는 무리가 적지 않다. 큰 교회는 사람들이 많아서 1부, 2부, 3부… 형식으로 주일예배를 나누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그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도 한다. 그럴 수 있고, 나름은 그 의미도 있겠으나 자칫 허탄한 예배가 되기 십상인 것은 ‘자기 형편에 따라’ 시간을 고르고, 요즘은 또 줌으로 예배가 가능하여 굳이 교회로 모여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어졌다!
이에 따른 형식적인 참여가 우리의 거룩을 자라지 못하게 한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주를 향하는 마음을 저해한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1).” 우리 주님은 그러하신데 우린 과연 어떠한지? 몸만 그러하고 마음은 저러한지, 마음은 원이로되 몸은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인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앞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이었다. 후일에 예수님도 경고하시길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어찌할까? 나는 요즘 평소의 말, 뭐라 이르고 또 권면하기를 자중한다. 그래봐야 말 안 듣는다. 사람 안 변한다. 나는 이를 마음에 두고 주께 아뢴다. 말씀을 전하면서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이를 알린다.
하면 성령이 하실 것이다. 나는 다만 전하였고 선포할 따름이다. 사람,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이를 깨닫는다. 자식들이 어릴 땐 그리 야단치고 훈계하면 될 줄 알았다. 다 자라 성인이 되었을 땐 그 뜻이 더욱 선명하게 전달될 것이라 여겼다. 하물며 자식도 요지부동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남들과는 오죽하겠나? 이를 알면서 나는 가급적이면 내가 나서서 누구더러 뭐라 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러려고 하는 것은 그런 뒤 내가 견디기 어려워서이다. 이게 참 희한한 것이 글방선생으로는 가능하였다. 기껏 혼내거나 뭐라 이른 후 안 하면 별 수 없었다. 마음이 거기까지 가능하였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누구를 가까이 한다는 일은 저보다 저를 더 알고자 하고 사랑하려 든다. 그의 일로 뭐라 이른 뒤 그러려니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나는 애면글면 속 끓이고 심지어 위장병이 걸릴 지경인데 저는 언제 그랬내는 듯 다시 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아, 사람… 사람을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자식이고 부모고 남은 물론 자신조차 어쩌지 못할 일이었다. 하면 어쩐다? 나는 저가 듣든 안 듣든, 말씀으로 말씀 가운데서 증거하며 선포할 뿐이다.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과 장모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말씀으로 전한다. 다음은 성령이 하실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라 하여도 범죄하면 세상에 수치를 당한다.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3-4).” 오늘 이사야의 교훈은 이로써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린다. 성도가 성도답지 못할 때, 교회가 교회구실을 못할 때,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애 2:15-16).” 이 얼마나 구차하고 한심한 노릇인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해 사업을 구상하며 서로를 끌어들여 일을 벌이면 영락없이 사달이 난다. 처음엔 다 좋은 의도로 시작하나 사람관계 그리 영속적이지 못하다. 좋을 때나 좋은 사람은 친절한 타인으로 족하다. 교회의 성도를 한 지체로 말씀하신 주의 뜻을 무색하게 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 곧 교회는 하나님이 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행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이다. 성경 첫 장, 창세가 1장은 하나님의 업무일지 같다. 하나님의 처음 행보는 일하심이다. 그 하나님이 이르신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그런데 우린 요즘 거꾸로다. 먼저 하나님께 말하고 들으시라고 하는 꼴이라, 교회 사업이란 게 온통 세상적인 방식을 도용한다. 상업적으로 이익을 염두에 둔다. 그 구성원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지체를 이루기는커녕 ‘여기서, 거기서’ 서로의 경계는 정해진 듯하다. 서로 친절하다. 굳이 내가 하는 일을 알리고 싶지 않고 저의 일도 알고 싶지 않다.
그런 우리에게 보란듯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고 하나님이 일하신 기록을 펼치게 하신다. 친구가 어떻게 성경공부를 하나 하고 점심시간에 통화하여 물었다. 어느 사모의 계발로 요즘 유행하는(?) 성경공부방식이었다. 설명을 듣고 유튜브를 찾아 강의를 들어보았다. 저의 표현처럼 소박하게는 길라잡이 같이 성경을 알게 하고자 하는 ‘내비게이션’의 역할이었다. 한 시간쯤 듣다 접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참고서나 총정리 책은 버리게 한다. 무슨 글쓰기 하는 교재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의 참여를 돕는 것 같지만 도식화된 형식과 틀에 박힌 사고와 정해진 답안을 작성하게 하는 방식으로 고착시킨다. 나는 제멋대로 이해한다 해도 정해진 주제보다 낫다고 여긴다. 아무 글이나, 아무렇게라도 쓰게 하는 것은 저의 자유로운 발상을 위해서다. 심지어 ‘쓸 게 없어요!’ 하는 친구에게 ‘욕 써!’ 하고 평소 말로 할 수 없던 속내를 욕으로라도 쓰게 한다.
성령은 한 번도 쉬지 않으신다. 행여 잘못 가고 ‘엉뚱한 짓’으로 끝난다 해도 그 가운데 함께 하심을 알게 한다. 우린 믿고 맡기는 훈련이 우선이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오히려 나는 순수하였던 신앙을 그리워하는 여러 학생들을 보았다. 또는 안 하니만 못한 결과로 휴학하거나 떠나는 경우도 보았다. 앞서 문예창작과를 다닐 때도 그 전에 나는 시를 좋아하고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문학생이었다. 그러다 점점 시를 쓸 수 없어졌고, 읽어도 예전에 느끼던 감흥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시를 좋아하고 사랑하나 이를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주제나 소재를 찾으려는 무의식적인 해석을 피한다. 물론 난 잘 모르겠다. ‘그런 성경공부’를 해서 얼마나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될지…. 내가 뭐라 일러 하라마라 할 것은 아니어서 오후께 잠시 마음이 어려웠다.
이처럼 우린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티끌 같을지라도 말이다.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날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5).” 오늘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멸망에 대하여 말하고자함이 아니다.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인 것을.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9).” 주가 행하시는 일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주가 행하시는 일임으로 우린 때로 몰라도 된다. 주만 사랑한다면,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설령 내 삶이 어떠하다 해도,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119:59-60).
오늘 시편에서 내가 주를 사랑한다 하는 것은 주를 잘 알고 그 말씀을 다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47-48).
이에,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7).
나의 영혼이 살아야 내가 주를 사랑할 줄 안다. 내 머리로는, 내 삶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주의 사랑에 대하여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다시 말하면 말씀을 의탁하고 사는 삶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67:1-2).
이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18-19).
마치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말씀을 읽고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 같으나…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우리가 먹는 음식의 영양소를 일일이 다 알고 그 성분이나 어디에 어떻고 하는 것을 몰라도 산다! 몸이 원하는 게 몸에 좋다는 한방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는 성경이 그렇게 우리 안에 스며서 우리로 일상을 영위하게 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를 알고자 하여 상고하고, 묵상하는 것으로 성령은 그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확장하신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일하신다. 놀거나 쉬거나 다른 데 가 계시지 않는다.
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사오니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26-27).
오늘 시편에서 나는 답을 얻는다. 반드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다만 내 안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면, 성령은 가장 선하게 인도하신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34-36).
그러하시며,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지키리이다
영원히 지키리이다
(43-44).
그렇게 무던히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잠 28:18).” 이 명료하고 단순한 진리 앞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그렇듯 그저 나의 한 날은 무료한 듯하나 분주하고, 분주한 듯하나 자유하여서, 가만히 주를 생각함으로 주신 나의 몸뚱이 하나로 혹은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것들이 주를 마주하게 하였다. 그렇게,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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