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이사야 31:4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시편 119:96(73-96)
애굽 곧 세상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데 따른 경고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선민을 보호하시고 회개하게 하신다. 회개는 우상처럼 떠받들던 것을 버리고 주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다. 묵상이란 마치 사자가 그 어떤 위협에도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4).” 이는 여호와의 강림, 성령이 싸우시는 중이다.
불신앙은 엉킨 실타래 같다. 마음이 복잡해지고 생각이 많다. 재고 따지고 할 게 서로 뒤섞인 듯하다. 이러려니 저게 문제고 저러려니 이게 문제인 게 믿음 없음이다. 믿는다고 믿으면서 그러한 게 불신앙이다. 안 믿는 자에게는 불신앙도 없다. 믿음이 있어 그리 살려는 것인데 그것보다 더 나은 듯한 ‘애굽’이 늘 곁에 있으니, 이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말씀으로밖에 또 다른 길이 없다. 시편은 이를 고백하였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5-4).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107:19-20).
말씀하실 때 의로우시다 하고 그 신앙은 회복하고, 말씀을 보내어 고치실 때에야 위험한 지경에서 건짐을 받는다. 우리 성도란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같다. 묵묵히 주어진 일에 충실하였던 노아나 갈 바를 알지 못하는데도 가라하심으로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이나 모든 걸 버리고 이내 지팡이 하나 들고 애굽에 맞서는 모세와 같이…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그 공통점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말씀을 붙들고 의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못 견디고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오늘 모두의 말씀처럼 우린 얼마나 자주 그리 엎어지곤 하는지.
성경은 누누이 일러,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신 17:16).” 한데 그리하는 것이 ‘그런 상황’에서는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누구와의 대화를 끊고 놓아두는 것으로 저와 하나님의 내밀한 만남을 구하고 있다. 같은 말이 오가고 또 그런 상황에 대해 백날 같이 머리를 맞대고 있어도 소용없다. 믿음은 마치 ‘어쩔래?’ 하고 턱밑까지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드미는 것과 같다.
이때 우리 믿음의 진가는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다. 결론은 항상 말씀인데,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와 같이 죽어도 이것만은 놓치지 않게 하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즉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심이 믿음으로 들은 것이고, 붙든 것이 말씀이다. 그 말씀을 삶으로 묵상하는 것이 신앙이다(눅 17:21). 오늘 성경은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하고 우리 안의 ‘무모한 믿음’의 출처를 분명히 하신다. 이는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5).” 이와 같은 확실한 확신, 나는 이를 늘 구한다.
자주 밝히지만 나는 주 앞에 때로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마음이 어렵다. 불신앙이다.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부모 때문에 때론 자식 때문에 속병이 날 정도이다. 그러니 남들에 대해서는 내가 왜 이처럼 마음을 쓰나 싶을 정도인데, 그렇듯 나를 들들볶다 저절로 일이 해결되는 것에서 또 다시 나의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한다. 누구나 그럴 테지만 우리의 사소한 불안과 긴장이 스트레스가 되고 만병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신앙이 뒤엉켜 불신앙의 나락으로 던져지기도 하면서… 그럴 때면 더욱 간절하게 되는 것이 ‘붙들고 늘어질’ 말씀으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나는 이 구절을 장모에게 열 번 공책에 옮겨 쓰시라 숙제를 내주고 내 안에도 새긴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증거로 소망도 한다. 이때의 소망이 다 보이고, 다 잡힌 것이면 누가 소망하겠나? 말도 안 되는, 무모한 짓 같은, 지금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그러한 일을 두고 ‘바라는 것’이 소망이다. 이때에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하는 당연한 말씀 앞에서 좌절한다. 그와 같이 당연한 것을 그처럼 어려워하는 것이 불신앙이다. 그러니까 생각이 많아지고 여러 궁리를 하다 ‘애굽’의 도움을 구한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때론 몽상가 같이, 그러나 지극히 현실 가운데서. 때론 돈키호테와 같이 무모한 자 같으나, 그럼에도 묵묵하여서….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32:9).
믿음도 그러하여서 거저 얻을 땐 몰랐는데 이를 지니고 살려니까 신앙 안에서 부대끼는 것은 당연하였다. ‘무지한 말과 노새 같이’ 우리 안에 이미 깊숙한 자아가 또는 아집이 얼마나 견고하고 굳건하기만 한지, 우리의 ‘이스라엘’은 심줄 같은 죗된 고집을 꺾지 못하고 끊임없이 애굽을 기웃거리게 한다. 이에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잠 10:17).” 그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보이시는 어려움이 복이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이를 시인은,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119:89-91).
그리하여,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141:4).
자칫, 저들(애굽)처럼 사는 게 무난한 인생인 듯 여겨진다. 그저 남들처럼 사는 것, 인간으로서는 그 일의 숭고함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령 누가 내게 어떤 약을 권하며 누가 그 약을 먹고 모든 불안과 공황에서 나았다며 성화였다. 한두 번 그러는 거야 그만큼 나의 사정을 염려해서이겠거니 하는데, 나는 솔직히 낫고자 하는 마음이 크지 않다. 그리 말할 수는 없어서 그 성화에 저이가 먹었다는 ‘특별한 약’을 사진으로 찍어서 병원에 갔다. 어찌 말할까 하다 핸드폰에 저장한 그 약을 보여주었다. 의사는 약을 네 알로 구성된 약을 살피고는 풋, 하고 웃었다. 네 알 가운데 두 알은 비타민과 소화제를 반 알로 잘라놓은 것이고, 한 알이 우울증 약이고 한 알은 안정제였다. 그것도 반씩 잘라놓은 것으로 보아 상태가 그리 심한 경우는 아닌 듯하다고 하였다.
우린 얼마나 ‘애굽’에서 위로를 삼고는 하는지… 이는 마치 플라시보효과처럼 가짜로 진짜처럼 안심시킨다. 애굽의 실상이다. 그러나 성경은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세상에 징계를 좋아할 자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그렇게 세상과 함께 가짜로 속아 정죄함을 받느니, 죽이시더라도 살리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곧 나를 오늘 나로 두신 데 대해 나는 이제 더는 낫고자 하는 데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으로 주를 더욱 사랑한다.
이 말도 안 될 소리가 된다. 이상하게 내 안에서 그리 되는 것을 희한하다 여기면서 적당함으로 되레 감사하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누구에겐 질병을, 누구에겐 가난을, 누구에게는 실패를, 누구에게는… 이와 같은 현실을 누구라도 싫어할 테지만 그것으로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 승승장구하며 애굽을 능가하는 애굽인으로 사는 것보다 낫다. 이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일체 물러서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7:8-9).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5-6).
하나님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심은 내가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119:73).
오늘 시편은 이를 알았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74).
비록 그 수가 적더라도 우리의 가장 안전한 길은,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75).
나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을 움켜쥐고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4)” 내가 그러함을 나는 인정한다. 나로 주 앞에 붙들어두시려고, 노아로 말씀 앞에 무던하게 하시려고, 모세로 애굽의 권세를 내려놓게 하시려고… 사람들의 외면과 미다안 광야라도 기꺼이 주의 은혜이었다. 그러므로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76-77).
하여 나도 요구한다. 구하고 바란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81).
다만 성경으로만, 오직 말씀으로만 붙들려 살게 하시기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러니 병이 나은들? 출세하고 성공하여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았다 한들? 여전하여서 그가 죽을 때에도 호상을 맞이했다고 한들? 나는 이제 부럽지가 않다. 그러느니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겔 44:23).” 이를 위하여 오늘 나의 어려움이 은혜인 것을!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88-91).
그러므로,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9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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