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전봉석 2023. 4. 6. 05:00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이사야 38:17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죽을병에 걸린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며 십오 년의 생명을 연장하게 된다. 이는 단지 이 땅에서의 목숨이 더 유지되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생명 연장의 축복으로 히스기야는 찬송하고 주께 영광을 올린다. 하지만 그런 뒤 저의 생을 비춰볼 때 연장되어 이룬 일이 과연 굳이 더 살았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역대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될 므낫세를 낳고 그 기간 저는 자신의 연장된 삶에 도취되어 교만하였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하신 줄 알지만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으로였다.
 
오늘 본문으로만 보면 시련이 우리로 믿음을 가꾸게 한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1).” 그 때는 여전히 앗수르의 유다 위협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 히스기야의 남다른 신앙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2).” 그리하여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할 때 우리의 소망은 갈라진다. 세상을 소망하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줄어들고 천국에 대해 소망하면 세상에 대한 소망이 줄어든다. 그래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에 따른 소망은 오히려 일상을 값지게 여기며 주신 삶에 성심으로 행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삶에 대한 애착과는 다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주의 쓰심에 보다 합당하기를.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
 
삶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데서 그 소행을 바로하려는 데 있다.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저는 오히려 죽어서 빨리 더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바랐으나 그가 맡기신 일을 위하여 남은 생을 산다고 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때에 우리가 자칫 오류에 빠지기 쉬운 영성이 있는데 그 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교만하게 구는 것이다. 즉 누구에 대하여 영적이지 못한 데 따른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어떤 경험’을 강조하다 성경의 의도에서 탈선한다.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영성으로만 받아들인다. 또 하나는 자신의 그러한 신념(?)으로 인하여 기존의 정통 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교단이나 교회에 속하기를 꺼려하고 저들을 비판하는 데 거침이 없다. 한참 영성운동이 붐을 이룰 때 알게 모르게 저마다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엘리트주의가 팽배하기도 하였다. 광적인 몰입과 기도나 방언 등 마치 자신들만의 특이한 소유물인 듯 자부하기도 하였다.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닥치는 것은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게 하는 기회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저의 생명을 연장하셨고 앗수르의 손에서 건지셨다.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사 38:7).” 하고 이사야는 다음의 증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을 밝힌다.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8).” 곧 우리의 어떤 어려움이 우리로 주를 간절히 찾게 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행사를 보게 한다. 곧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18-19).
 
주는 우리로 사망에서 건지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9-10).” 바울의 전언과 같이 이는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에서다. 곧 나의 생명과 모든 일상은 하나님의 주도 하에 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39:4-5).
 
그리하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90:12).
 
일련의 사태와 상황을 겪으면서 나는 모두가 생에 대한 애착이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는 데 새삼 놀란다. 아직 그와 같은 시점을 경험하지 못해서도 그렇겠지만 내가 두려운 것은 고통에 따른 악함이 드러날까 두려운 것이지, 할 수만 있다면 속히 주의 곁으로 평안히 이르기를 소망한다. 그때가 되면 하루를 더 살기를 악착 같이 소원할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말하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죽음에 대한 가벼움은 비례한다.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부족할 때 이 땅의 생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 있다. 살기 위해 기를 쓰고 살고자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 또한 장담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고단함으로 죽음을 고대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소망하고 그리하여 오늘을 오늘만 산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이를 증거하게 돼 있다.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사 38:16).”
 
히스기야의 기도가 단지 이 땅에서의 생명연장을 꿈꾸어서 하는 것은 아닐 거였다. 바울과 같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를 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66:16).
 
살아서 사는 동안에 나의 과업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저녁에 장모에게 다녀와 위로하고 기도한 후 아내와 둘이 말씀을 나누면서 예배할 때 전하였던 말씀이다. 우리가 살아서 가지는 소망으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이와 같은 고백으로 살기를. 죽음은 마무리가 아니라 아니라 준비다. 생을 마감하는 일 같지만 영생을 시작하는 일이다. 그에 따른 준비로 잘 죽는 일인데, 나는 행여 죽음을 건너며 너무 심한 고통으로 나의 악함이 드러날까 두렵다. 죽는 자체가 아니라, 나의 나 된 것으로 행여 주변을 고통스럽게 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하여,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 다만 그 너머 주를 뵈옵는 일에는 소망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바울도 꿈꾸었을까?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8-9).”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인생의 덧없음에 대하여는,
 
그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35:5).
 
하여,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03:15-18).
 
이를 알고 바르게 생을 마감하면서 동시에 영생을 준비하는 삶이기를. 나는 요즘 곧 다가올 노모의 그러한 시간을 두고 자주 기도한다. 어제도 장모는 그만 돌아가겠다 할 때에 기도를 구하였고 나는 깜빡 잊은 듯 도로 앉아 장모의 손을 잡고 주의 평안을 간구하였다. 내심 그 속에 있는 두려움을 우린 누구라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붙들 말씀 가운데 하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하여,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40:1-2).
 
우리의 이 날을 우린 소망하면서 또한 확신한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100:4-5).
 
이를 위해 우린 오늘도 산다. 일상은 항상 죽음을 대비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헛껍데기 같은 영성에 자아도취 되어 사는 일보다 현실, 일상을 살면서도 주를 찬양하는 것이 복이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의 것임을.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11:7-8).
 
이것이 살아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감사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사 38:19-20).” 하여,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22:1).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삶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평안이 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2).
 
하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122:6-7).
 
이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있을까? 요즘 나는 장모의 일로 나의 주신 삶과 그 사명을 점검한다. 주어진 육신의 이런저런 고단함에 대해서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곧 이 땅의 것은 다 지나간다. 끝이 난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리하여 나는 간구한다. 우리가 눈을 두고 사는 곳,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9).” 하여,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