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전봉석 2023. 4. 7. 04:52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39:5-6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주의 은혜로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연장되었다. 이를 축하하러 바벨론의 사절이 왔다. 반앗수르 정책을 취하면서 바벨론과 화친하는 의미로 바벨론과 동맹하였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은혜를 입고 이와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이 의아하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이방 국가의 군사력에 의지한 것은 전술적이었다 해도 용납이 어렵다. 결국 저의 경거망동으로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파국을 맞게 된다.
 
다윗 이래 가장 선왕으로 손꼽히는 그였으나 히스기야 역시 별 수 없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럴 수 있고, 그 정도 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은 금이 간다. 근신하지 않을 때 사탄은 때를 놓치지 않는다. 예물과 사절을 보내 화친하자는 적국의 친절을 마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잃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성경은 늘 주의를 주시길,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예수님도 이에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눅 22:40).”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오늘의 악함은 선함과 혼용되어 분간이 어렵다. 선행과 의로운 일에 대해 우린 누구라도 좋게 여긴다. 설령 저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아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린 다만 눈으로 보이는 것에 혹한다.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종파에서 이를 내세워 청년들을 취합하고 해외봉사나 연수를 후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히스기야의 축복’은 실제 우리 삶에도 자주 영향을 끼친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의’에 격노하신 이유는 저들의 생각이 육에 있고,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곧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 앞서 히스기야가 그의 끝을 받아들이며 순응하였다면 어땠을까? 사뭇 그런 아쉬움이 드는 것도 그래서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는 데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8-9).” 어쩌면 이 간단하고 사소한 일에서 어그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를 알게 되었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 8:35-36).” 여기서 ‘나’는 지혜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현재성이다. 지혜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를 탐구하는 철학도 아니다.
 
우린 욥기에서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시편을 통해 기도를 배운다. 잠언에서 삶과 그 실천을 배우고, 전도서를 통하여는 진정한 즐거움을 알게 한다. 아가서는 참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인생에서 고난은 불가해한 것으로 우리가 이를 정의할 수 없음은 하나님의 뜻이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아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우리가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일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에,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 119:128).
 
따라서 신앙 안에 산다는 일은 ‘사람의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일 텐데, 우리가 살면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와 같은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하는 바울 사도의 결연함은 의미가 크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4).
 
우리의 삶과 그 자랑은 하나님께 향하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다. 이를 인정하는 데서 ‘나의 나 된 것’을 은혜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히스기야가 그리 받고 이를 은혜로 여겼더라면 어땠을까? 표면적으로 히스기야의 기도에 따른 응답과 그가 받은 생명연장을 복으로 여기는 것 이상으로 그 의미는 컸다. 하나님은 미리 다 아신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당장의 어떤 일, 그 결과로 마치 전부를 이룬 듯 즐거워하는 것도 또는 모두 잃은 듯 슬퍼하는 것도 주의할 따름이어서, 우리는 다만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우리가 주를 인정하는 것은 그러므로 심오하다. 나의 판단과 기준을 포기하게 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기준에 있어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어떤 어려움, 그와 같은 문제를 두고 문제에만 집중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더하시는 어려움은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미 6:9).” 이에 우리의 축복은 주를 경외하는 데 있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1).
 
이번 한 주 내내 이 한 구절의 말씀을 음미하는 데서 모든 상황과 여건을 되새기고 있다. 일련의 상황은 분명 우리 모두를 어렵게 하였다. 아차, 하던 그 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던져졌고 이에 후회와 자책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면 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의지하는 것,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123:1).
 
이는 우리로 다른 무엇에 의존하거나 어떤 방법을 찾는 데 제동을 건다. 세상에서 살며 세상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먼저 ‘하늘에 계시는 주’를 인정하는 일. 곧 ‘하늘’이라는 중의적인 의미에서 우리 안에 주를 경외함과 함께 주를 인정하는 것이 자리매김한다. 그리하여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상황은 달라진다. 마음의 빛, 마음의 창, 마음의 눈이 향하는 곳.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 속에 모든 답이 숨겨져 있다. 이에 우리의 기도는 한결같아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5:2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이때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어떠하든지 오늘을 꿋꿋하게 살아내는 은혜이다. 이때에 우리의 기다림이란,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
 
어쩌면 새순이 돋고 싹이 올라 열매를 맺는 데까지는 기다림이라는 시간과 공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훗날 저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고국으로 돌아올 때에 그 거리는 무려 800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대장정이었다. 이를 한 걸음씩 걸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 한 분만을 바라고 의지하여서 가능하였다. 광야 40년의 여정도, 70여 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도 모두가 기다림이라는 자양분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세상이 모든 게 끝이 있고 그 정도가 있어서 감사하다.
 
긴장한 탓인지, 날씨 탓이었는지… 나는 이번 주간 내내 양쪽 어깨가 뭉치고 뒷골이 당겨서 고통스러웠다. 결국은 어제 참다못해 자주 가는 정형외과에서 근육이완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아왔다.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을 가했고, 고통은 임의로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주사 맞고 며칠 더 뻐근할 거라더니, 나는 지금 어깨를 펴지도 목을 숙이기도 어렵다. 이럴 때 나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주를 바란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하면 반드시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이에 그 일은 이루어질 것이어서,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123:3).
 
주 앞에 나를 두는 일.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와 저의 응답에서 아주 귀한 것을 배운다. 있는 그대로 주신 상황에 순복하던가, 낫고자 하여 얻은 바 은혜가 크면 더욱 겸손하여 주만 바라던가…. 그러할 때,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03:13-14).
 
이 먼지 같은 인생여정에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 이상의 가치와 값어치를 하며 주를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하여,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25:21, 38: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