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이사야 36:21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편 120:2
B. C.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했다. 유다 대부분의 성읍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반앗수르정책을 펼친 히스기야를 획책하며 항복할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다. 저들의 군대장관 랍사게가 이 일을 주동했다. 히스기야는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삽나와 사관 요아를 내보내 협상을 유도했다. 히스기야가 애굽과 여호와를 의지하여 자신들을 배반했다고 책동한다. 랍사게는 그런 히스기야를 조롱하고,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 말함으로써 앗수르에 대적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
히스기야는 여러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종교개혁을 이룬 유다의 몇 안 되는 왕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와 같은 시련을 허용하셨다. 왕의 종교개혁을 피해 유다 곳곳은 여전히 애굽과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만 굳게 선다는 일은 사사로운 것에 의해 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히스기야 14년에 결국 산헤립이 랍사게를 앞세워 유다를 침공하였다. “히스기야 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1).” 이어 4절부터는 유다를 침공하기에 앞서 랍사게의 획책과 저주의 말이 이어진다. 더 이상 유다에 희망이 없음을 알리고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애굽에 의지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저의 입을 통해 알게 한다. 하나님 역시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고 모욕한다.
7절에서 이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이는 평소 우리를 종용하고 획책하는 사탄의 속삭임과 우리 마음의 갈등과 흡사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고 더는 희망이 없을 때, 더는 하나님이 도울 수 없을 것 같은 때, 우리 곁의 랍사게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이때 우리의 방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소망하는 것이다. 어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도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있다는 데서 눈을 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119:49-50).
시편 가운데 늘 내가 붙들고 자주 흥얼거리듯 되뇌는 말씀이다. 일련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우린 또 이게 뭔가, 하는 절망에 사로잡혔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내는 불안에 떨었으며 주변의 모든 이들이 놀랐다. 저마다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는 짐작이 간다. 그렇게 몇 시간, 혹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시는 말씀이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아내는 벌써 노모를 모신지 10개월을 넘기면서 심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지쳐있었다. 신경은 예민해졌고 잦은 혈기로 뒷골이 땅기는 증상도 나타났을 정도이다. 서로 얼마동안 분리했으면 좋겠는데, 손위처남내외는 둘 다 집을 비워야 하고 결국 어머니 혼자 거동하다 어떤 일이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장모는 요양병원은 죽을 것처럼 싫어했다. 싫든 좋든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었다. 저녁마다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일도 귀하여 마다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이런 일이 벌어졌고, 장모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때만 해도 어렵겠다 싶었다. 한데 손목이 부러지고 무릎이 부러졌는데도 기이하게 그 뼈가 부러졌다. 가로로 부러져 뼈가 서로 어그러졌으면 응급수술이 필요할 거였는데, 어찌 됐는지 세로로 부러져 금이 간 듯 그대로 붙어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손목은 세 곳이 부러졌는데도 그런 상태였다. 무엇보다 심하게 부딪친 머리와 목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결국 수술 없이 2주간 간병인 병실에 입원하여 요양하는 것으로, 그대로 뼈가 붙을 것이고 그때 다시 검사를 하고 퇴원을 하든지 수술을 하든지 결정하자고 결정이 났다.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하루 사이 아내는 밝아졌다. 어제는 집안청소를 하고 옷 정리를 하였다. 그렇게 하나님은 아내에게도 장모에게도 안전한 2주간의 쉼을 선사하신 셈이었다.
나는 일련의 사태에서 또 한 번 하나님의 개입이 얼마나 생각지도 못한 선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았다. 물론 이런 말을 누구에게도 조심스런 이야기지만 저들 개개인도 그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거였다. 일면 우리의 고난이 더 깊은 하나님의 의도인 것을, 그리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여 시인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71).
이를 아는 사람은 안다. 고난이 좋을 리 없고 고난 앞에서 누구라도 좌충우돌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는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21).” 산헤립의 랍사가가 온갖 말로 획책한다. 앞서 여러 성읍이 당하였다. 예루살렘은 이제 포위되었다. 곧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주를 신뢰하기 위해 우린 인위적으로라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누구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저의 비난에 억울함을 토로할 것도 아니다.
다윗은 행동하였고,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삼상 17:45, 49).” 바울은 개의치 않고 복음을 전하였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살전 2:2).”
덩달아 부화뇌동하여 쓸려 다니는 안개 같아서는 어림없다. 우린 되레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고 그의 뜻을 헤아리고 알게 된다. 여기서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이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하나님의 일은 말과 혀에 있지 않다. 또는 다른 자구책을 찾는 일도 애굽을 짚어 오히려 손을 다치는 상한 갈대지팡이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곧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 11:18).”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복은 불가능한 중에 있다. 다음 주일 본문 128편을 펼치고 어제는 들락거리며 읽었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선언이 있다. 먼저 본문의 선언 세 가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 수고한 대로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 반드시 형통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약속 세 가지, 예루살렘에 살 것이라는 것. 네 자식을 볼 것이라는 것. 내 집 내실의 아내와 상에 둘린 자식을 볼 것이라는 것. 이와 같은 선언과 약속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구심점이다.
이미 하나님은 복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우리로 그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2).” 이를 축복하셨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49:28).” 이는 아담에게 국한되는 선언도, 아브라함에게 제한된 선언도, 야곱만이 선포할 수 있는 축복도 아니다. 우리의 행복은 복으로 정의되어 오늘에도 여전히 개개인의 삶 가운데 드러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여덟 가지의 복의 근원을 알게 하신 바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3-10).” 곧 우리의 행복은 말씀으로 주어졌다.
말세의 때에 일곱 가지의 축복도 다를 게 없다. 계시록에 기록된 행복의 정의를 찾아보았다.
첫째, 이를 읽고 듣고 지킴이 복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둘째,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셋째, 깨어 항상 자기 옷을 깨끗이 하는 자는 복이 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6:15).”
넷째, 청함을 받고 이를 참되신 말씀으로 따르는 자는 복이 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19:9).”
다섯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6).”
여섯째, 이 말씀을 지킴이 행복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일곱째, 그 행실을 바르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22:14).”
곧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도 여러 행복을 보지만 참된 행복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자들이 충만함으로 누린다. 가령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하여 좋은 성적으로 만족하는 이들이나 참고 견디어 자신의 꿈을 이룬 자들의 행복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다. 성경의 정의는 간단하였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다른 수는 없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은 그 뜻이 분명하였다.
첫째, 영원히 우리 영혼의 내적인 힘이다.
둘째, 인생의 모든 행복이 그 영혼의 만족함에서다.
셋째, 우리가 아직 산 것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 영혼의 중심부에서 활동하신다.
다섯째, 세상 그 무엇으로는 채울 수 없는 힘이다.
여섯째, 우리는 놀라운 만족함과 창조능력이 있다.
일곱째, 가장 포괄적인 삶의 의미이며 생활력이다.
오늘 본문도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처한 상황도 감당하지 못할 복이 있음을 알린다. 저들은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헛되다고 하나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사 36:7).” 성경은 이를 묵살한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3-15).” 하면,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57:3).
이를 안다는 것, 그리하여 침묵함으로 주의 때를 살피는 동안에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사 36:21).”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하여,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20:7).
이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반응은 회개다. 오늘 시편의 주제로 우리가 천성을 향해 나아갈 때 첫 발을 뗀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120:1-2).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그러므로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잠 26:4).” 그러므로 자신에게 선포한다.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3-4).
스스로에게 선포하지 않으면 자신의 징징거리고 불평하는 소리로 질식할 수밖에 없다. 먼저 말씀으로 선포하고 믿음 가운데 굳건해야 한다. 아니면 늘 걱정 근심에 끌려다닌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5).
그리하여 결국은,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6-7).
이는 모두 자처한 일이다. 하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 1:6-7).” 그리하여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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