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사야 44:2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하나님은 선언하시고 이를 실행하신다. 약속하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를 지키신다. 그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름으로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3-4).”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실행을 알면서 우리가 더는 도적질도 탐욕도 술 취함도 더하지 않는다. 모욕하고 빼앗는 자로 살지 않는다.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0-11).”
주의 뜻을 알려 부산하였던 마음이 “이제 들으라.” 하시는 데서 멈춘다. 오늘 1절의 말씀이다. 저는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2).” 곧 우리 귀가 열리고 마음이 뜻을 모아 ‘여수룬’으로 불리기에 합당한 자가 된다. 여수룬은 ‘바르다’, ‘평탄하다’, ‘정직하다’는 뜻을 가진 의미로 ‘야솨르’란 단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의로운 자’, ‘정직한 자’의 의미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 성장하기를 ‘야솨르’ 곧 ‘여수룬’이라 불리는 데까지 자라가야 한다. 이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하는 말씀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를 위하여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오늘 우리로 일련의 사건과 상황을 환난으로 두시는 것 아닐까?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생활이 어려운 건 견딜만하다. 몸이 고단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겨낼 수 있다. 하나 마음이 어려운 것은 몸을 거스르고 생활을 혼잡하게 한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나는 주의 도우심이 간절하다. 어떤 판단이나 행동에 있어 주가 붙드시지 않으면 마음은 저 혼자 요동치는 것이어서….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 44:3-4).”
오늘 말씀을 오래 머금고 우물거리며 그 뜻을 음미하게 된다. 우리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성령이 아니시면 이를 다루어 헤쳐 나갈 권능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어찌 그 일에서 놓여날 수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그럼에도 우리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이의 뜻에 따라, ‘우린 할 수 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 8:8-10).”
육으로 살 것인지, 영으로 살 것인지…. 어제는 아내의 긴 한숨 뒤에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7).” 곧 우리 삶에 재림신앙이 빠지면 사는 게 빠듯하다. 믿기는 믿는 자이나 세상 재리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지고 있는 것을 놓지 못하고 더 갖고자 하여 항상 그곳으로 마음이 기울어서 정작 지녀야 하는 마음이 무엇인지조차 분간하지를 못한다. 재림신앙에 대해 묻는 아내에게 ‘언제든지 오라, 하시면 갈 수 있는 삶’이라 단정하였다. 준비된 삶. 오늘 부로 생을 마감한다 해도 더는 아쉬울 게 없는 영혼으로 사는 것. 어찌 생에 미련이 없이 살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 데서는 ‘난들 아나?’ 하고 나는 으쓱,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할 수 없으니 주를 바라는 것이고, 주를 바람으로 앞으로의 이런저런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아들 일로, 친정엄마 일로 수심이 가득한 아내에게 나는 덧붙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하는 본문을 같이 나누었다. 장모와 같이 기거하면서 가정예배 형식이 같이 성경을 읽는 정도에서 이를 풀어 설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자연스럽게 아내와 둘이 앉아 어제는 고린도전도 1장을 놓고 하나하나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십자가의 도’ 곧 이 땅에서도 ‘죽어야 산다’는 의미와 같아서 부활이 없으면 재림도 없고, 재림신앙이 확고하지 않으면 구원의 확신도 없다. 아내는 항상 ‘안 해본 것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꿈이 많다. 그 꿈은 여느 사람들이 꿈꾸는 노년의 다복한 것인데, 이를 바라는 것을 뭐라 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천국을 사모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이 미뤄진다면… 그래서 그 신앙은 늘 고비사막과 같이 모래언덕을 지나는 것 같고 심한 갈증으로 세상이 주는 물로는 목마름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곧 장모가 퇴원하면 어찌 할 것인지, 더는 그 고집을 감당하기 어려워서도 요양원을 염두에 두면서 슬픔도 같이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보았다. 일련의 상황이 성경을 생생하게 한다. 말씀을 붙들게 한다. 일상과 연관 없는 말씀은 ‘그림의 떡’과 같다. 우리는 감상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공연장에 앉아 관망하는 자들이 아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황홀경에 빠진 베드로를 이끌어 저잣거리로 내몰고 귀신 들린 아이와 먼저 마주하게 하신 덴 다 이유가 있다. ‘사는 게 지옥이다.’ 말씀으로 평안하였다가 돌아서기 무섭게 현실이 짓누른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우리가 사는 법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으로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재림신앙이었다. 오늘이라도 오라 하시면 가야 하는 인생에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또는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고전 16:22).” 하면 오늘의 이 모든 ‘문제’에는 ‘정답’도 있다. 아내는 아들 일로 한숨이 길다. 친정엄마 문제로 손위처남댁과 이런저런 대책도 의논했던 모양이다. 남자들이란 본디 욱, 하는 감정 빼면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없는 족속이라….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다만 그것이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해가 되지 않기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오늘 본문은 명료하시다. 우리의 생각이 복잡한 것이지, 군더더기가 없다. “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7).” 우리가 백날 설왕설래 하며 여러 방책을 의논한들 답이 없다. 이 땅에 왔던 것과 같이 떠나는 것도 주의 주권 하에 이루신다. 이를 어찌 해보겠다고 별의 별 수를 다 써보지만…. 나는 오전에 장모의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앞으로 퇴원하면 많은 게 바뀔 텐데, 어머니가 준비하고 각오해야 할 일을 설명하다 집어치웠다. 하나마나 한 소리다. 저는 저의 고집이 있다. 아내의 긴 한숨 끝에 나 역시 더는 요양원으로라도 보내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별 수 없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자기 고집대로 살다 죽는 게 인생이다. 이생의 자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생의 미련이든지, 자기 아집 때문이든지, 그리하여서도 우리에게는 재림신앙이 필요하였다. 주가 언제 오실지, 나로 하여금 언제 오라 하실지, 언제든 가야 한다는 것을 준비하며 사는 삶에 대하여.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 44:8).”
그리하여 우리는 주를 바란다. 그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오늘 하루의 일로 족하다. 헛된 꿈, 마치 2, 30년은 족히 더 살 수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꿈꾸는 것은, 우상을 두고 사는 일과 같아서.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9).”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마곡에 있는 집을 어찌 할까? 동대문의 땅을 어찌할까? 하면서 여기저기 자신들 명의로 소유한 것으로 질식하는 저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나름 다 때가 있다는 것인데, 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그러느라 오늘에 이르렀다. 마치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 보라 그와 같은 무리들이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10-11).”
나는 잘 몰라서, 그걸 팔아서 이걸 해결하면 되지! 하는 단순무식한 생각이 전부다. 도대체 그게 왜 복잡하다는 것인지. 다들 저마다 한 손에는 세상을 쥐고 한 손으로는 믿음을? 혹은 신앙을 쥐고 살려니까, 나름 믿는 자로 산다면서 그 씨름하는 일들은 안 믿는 자들의 염려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이런 소릴 또 한다. 어제 했던 말을 다시 한다. 그러나 장모도 아내고 손위처남도 다들 저마다의 생각들이 있어서… 그러다보니 오히려 나의 선택은 간단하였다. 말씀으로 외에는 입을 다무는 것. 아내 말마따나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나는 말씀으로만!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사 44:21).” 그러니까 나는 몰라도 된다. 아들에게 전화 좀 하고 만나라 하는데 나는 그냥 두는 것으로 할 일을 대신한다. 하나님이 하시라, 하고 나는 배짱이다. 속이 끓지만 어쩌겠나? 내가 말을 한들?
저마다의 하나님과 만나야 하고 그렇지 않아 재림신앙을 끝내 카펫 밑으로 치우고 살려 한다면… 그래야지 별 수 있겠나? 광야 40년을 돌고, 고난의 쓴 물을 마시면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그러니 이와 같은 말씀에 저마다의 반응으로 사는 수밖에.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성경은 열렸으나 들어가길 꺼려하면, 돌아야지. 허튼소리에 정신 팔려 사는 데까지 살아야지. 살아서 부디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날이 올 때까지 돌고 또 돌아야지… 그 끝에 후회와 탄식으로, 그래도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이키는 탕자여도 별 수 없는 것이겠지.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나는 오늘 말씀을 입에 물고 오래 앉았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이르기를 거기에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24-26).” 주의 선언이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1).
지난 주일에 같이 나눈 시편으로 복에 대하여, 그 출처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복이 있도다.’ 하는 현재진행형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4).
‘복을 얻으리로다’ 하는 미래완료형으로, 우리의 복은 궁극적으로 주를 경외하는 것일 뿐.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그러니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것이 각자의 판단이라면 그리하시고! 나는 다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저의 결단이 내 것이기를. 그러할 때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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