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3-4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130:5
바벨론의 신 벨과 느보가 멸망하고 모든 신상이 파괴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행하여지고 그 이름은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선민들을 구원하심으로 존귀와 위엄을 알리신다. 바벨론 가운데 선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각성하여 돌이키라 하신다. 구원은 신속할 것이고 공의는 가차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저들 우상을 파멸하실 것을 재차 확신시키신다.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사 40:19).” 그저 만들어진 것으로, “목공은 금장색을 격려하며 망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꾼을 격려하며 이르되 땜질이 잘 된다 하니 그가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을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는도다(41:7).”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지, 아무 것도 아님을 “보라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24).”
그러므로 이를 만든 자도 다를 게 없어서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44:9).” 결국 그것들은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 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19-20).”
우리에게 여전한 ‘벨’과 ‘느보’에 대하여 돌아보게 된다. 유형한 것은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나 잡으면 바람 같아서 손에 쥔 것이 없고, 무형한 것은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니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게 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그 결국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사는 것이다(22). 교만함이란 그 어떤 우상보다 자연스럽고 두텁게 눌어붙어 마음의 바탕을 버리게 한다. 자신을 보호하려 남을 해하고, 혼돈 가운데 우상 숭배는 냄새처럼 스며 흔적은 없다. 결국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 5:5-7).”
이와 같은 성경의 경고는 오늘 본문 모두에서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사 46:1).” 고작 그러한 것을. ‘벨’은 바벨론의 최고의 신으로 ‘마르둑’의 별칭이다. 지혜와 문학의 신으로 벨과 느보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와 그의 아들 지혜의 신 헤르메스로 이어진다. 저들은,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2).” 곧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무력하게 무너졌고 순식간에 사로잡혔다.
이를 오늘에도 ‘떠메고 다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우상은 숭배하는 자로 피곤하게 하고 그것으로 마음이 혼미하여 온통 그 타령으로 살게 한다. 돈돈거리지만 돈은 새고 건강염려증으로 좌불안석이라, ‘부처’도 앉을 자리가 없다. 우리 안에 여전한 우상을 나열하자면 그 생을 다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나니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렘 10:4-5).” 결국은 떠안고 사는 꼴이니 사는 게 지옥이라.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합 2:18).”
보면 어떻게 저런 자에게 부와 명예와 안락함을 더하시는가 싶은데, 그런 자이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하시었다. 하나님은 결국 하나님의 자녀에게 복을 더하신다. 우리의 복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그런 것과 같지 않다. 같지 않으니 마음이 닿지 않고, 우상을 떠메고 다니다 보니 사람들과 자꾸 같아지려 하는 게 아닐까? '남들처럼' 혹여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우상인 세상에서 오늘 본문은 “내게 업힌 너희여”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떠메신 백성이 있음을 확인시키심으로 우리가 업고 있는 것을 내려놓게 하신다(사 46:3).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4).” 하나님이 지었은즉 나를 품고, 나를 안고, 나를 업어서, 나를 구하여 내실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03:17, 121:7-8).
우리가 이고 지고 서있는 것을 대신 지시고 품으신다. 여기서 우리를 안고, 품고, 떠맡아 짐을 지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리신다.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를 알지 못하여서 어떠한 감격도 누릴 수 없다면 이는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하여,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68:19).
한데 이게 그리 어려운 이유는 무언가? 우리 등에 ‘벨’을 업고 ‘느보’를 안고 사는 게 아닐까? 입으로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발길로는 교회를 오가는 사람인데 그 마음과 생각은 물론 삶 그 자체가 이 땅의 우상으로 주를 바라는 것일 테니. 오늘 성경은 개탄하시는 바,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4).” 하면서,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5).” 참으로 그 형국이 가관이라. 차라리 안 믿는 자로 제멋대로인 자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꼴은 영락없이 안 믿는 자의 근심과 걱정뿐이라면…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6-7).”
설마, 그가 나인 것은 아닌가? 우리 자신이 그러하지는 않은가? 목사로 성도로 주를 믿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그 자부심 밑에 깔고 앉은 온갖 추함과 헛된 소망들은 다 무엇인지?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 이를 알지 못하면서 주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벨’과 ‘느보’와 다를 게 없이 무늬만 하나님일 테니….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이를 확신하고 살고 있는지?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86:8).
이와 같은 고백과 함께 말씀으로 살아야 할 터, 바울은 당부하였고 확인시켰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어제 아내와 둘이 앉아 이 말씀을 두고 나는 고백하기를, 행여 묵상하며 쓰는 글이 화려한 미사여구나 구사하려 드는 것이 아니기를. 하여 나는 주목 받는 생이기를 원하지 않고, 나의 구차하나 구구한 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체험하며 사는 일이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는 바울의 말이 내 것이기를 바라였다.
나는 그 하나님이 하심을 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 곧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게 하려 나를 내어드리는 것이면 되는데, 오늘 본문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사 46:8).” 내 안에 나의 패역함을 나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기억하기를,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9).” 곧 내가 주를 멀리하고 부정하며 살 때에도 주의 긍휼하심이 나를 한 번도 홀로 두신 적이 없어 버려두지 않으셨음을 고백한다.
이에 성경의 일관된 한 마디, “강하고 담대하라(수 1:6).” 염치없고 송구하고 뻔뻔스럽고 한심한 위인이지만… 가끔 아내와 농담처럼 진담으로 주고받는 말이 ‘하나님은 참으로 절묘하시다.’ 그때 나로 무너뜨리지 않으셨다면 나는 멸망하였을 것이고, 그때 나를 불러 세워 목사가 되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오늘은 더욱 개차반으로 인생을 허투루 살고 있었을 것인데… 주의 인자하심은 내가 놀라워하고 감사하기 이전에도 여전하시었다. 그러므로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7-8).” 말씀은 말씀으로 나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9).”
이와 같은 확신이 없다면 어찌 한 걸음이라도 더 발을 뗄 수 있을까? 어떠하여도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 이 놀랍고도 고요한 진실 앞에 우리로 입을 다물게 하신다. 그렇게 주는 알리셨고 이루셨고 이루어 가신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주가 이루실 그 세상에 나는 여전히 벨과 느보와 함께 서려 하는가? 아내와 나는 수시로 조바심 내다 주가 더하시는, 일의 되어짐 앞에 놀란다. 장모는 일주일 더 병원에 있고 싶다고 본인이 말하였고 당장 서둘며 몸살을 앓던 염려와 근심에서 머쓱하게 우리는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주님이 하신다. 늘 알면서 닥치면 매번 똑같이 안달을 부리는 우리의 ‘벨’과 ‘느보’를 주께 내어던진다.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사 46:12).” 하신 말씀에 그게 나를 향한 것임을 탄식한다.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13).” 그리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우린 다만 ‘어떤 깊은 곳에서’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30:1).
그럴 수 있는 특권은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였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7-8).
이 놀라운, 놀라워서 말도 안 되는 은혜 앞에서 나는 점점 더 할 말을 잃는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4-7).” 어느 것 하나 내 이야기가 아닌 게 없으니,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8).” 나를 오늘 여기에 두신 것, 우리로 한 영혼을 맡아 주의 길을 가게 하는 데 있어서,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우리로서는 오직 하나 주께 아뢰고 고하는 것일 뿐이어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3-4).
나는 나의 허물로도 주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송구하여 머리를 처박고서 외마디 소리로 주께 구한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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