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
이사야 47:4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바벨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가한다. 저들은 수치를 당하고 하나님은 이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신다. 저들은 사치와 안일함에 빠져 악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무시하였다. 누구도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 여기지 않던 때에, 벨사살 통치 B. C. 539년의 일이다. 앗수르를 공격하고 70년이 지난 때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으나, 멸망하는 날까지 벨사살을 위시하여 향락에 빠져 있었다. 당시 근동의 작은 나라였던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메대 군을 보내어 무혈 진압하였다.
심판은 유보될 때 악은 기승을 더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멸망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교만의 보좌는 티끌에 잇대어 있다. 본문 1절에서 그 정황이 엿보인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바벨론은 본래 앗수르의 통치 아래 있던 비천한 국가였다. 당시 극도로 악에 빠져 있던 앗수르를 바벨론을 들어 치셨고 주변 나라들의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문란함에 젖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데 사용하셨다. 이를 모르고 저들은 스스로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는 교만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8-10).”
하나님의 섭리를 읽지 못하면 당장의 현상에 빠진다. 직면한 날이 전부인 줄 안다. 그때에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9).” 우린 상기하고 깨달아 그 너머의 주의 손길을 살피어야 한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이는 당연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는 가차 없다.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47:2-3).” 오늘 본문은 경고한다.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위험신호를 울린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앞서 알게 하셨으나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 결국은 그리하였다. 그리하여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시 9:12).
이에 우리는 주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3).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 성도의 가장 큰 미덕은 단순함이다. 복잡하고 어지러울 게 없다. 즐거운 날에 찬송하고 슬픈 날에 기도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하여 우리로 복 있는 자가 되게 하심은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로다. 하나님으로가 아니면 우리 심령은 항상 가난하였다. 둘째, 온유한 자로다. 하나님의 그 어떤 처분에도 순응한다. 셋째, 긍휼히 여기는 자로였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서이다. 넷째, 마음이 청결한 자로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청결함이다. 다섯째, 화평하게 하는 자로다. 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역할이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이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로 말미암아… 사는 동안의 모든 일은 복이다. 복 있는 자로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시 1편). 하여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눅 6:22).”
사는 동안 우리가 주의 자녀로 산다는 일은 세상으로부터 외톨이가 되는 일이다. 같이 어울리던 안 믿는 자들이 나를 멀리한다. 나의 나 됨을 두고 꼴불견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우리 삶은 감출 수가 없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우리는 드러나지 않을 수 없으나 드러내지 않고, 감출 수 없으나 숨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은 숨길 수 없다.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9-10).”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가고 혼재되어 서로 물고 뜯고 난리도 아닌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주신 상황 속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우리도 요동칠 수밖에 없으나 우리는 이내 평안하였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3-4).
이 차이, 그 넘을 수 없는 사이에서 우린 더러 갈등한다. 오갈 데 없는 사람처럼 무얼 어찌 행하여야 할지 모른다. 그때에 나타나은 것이었으니 우린 비로소 죄를 죄로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란다. “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사 47:9).” 이러한 때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우린 주의하고 조심하는 사람들이다. 해이하여 안이하여질 때는 영락없다. 별 볼 일 없는 바벨론이 강하여지고 앗수르가 공격해온다. 저들을 페르시아가 평정하고 ‘고레스’의 손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갈린다.
이와 같은 성경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일상을 그려준다. 스스로 구원을 구하는 자는 멸망하는 자이다. 오늘 12, 13절에서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놀라게 할 수 있을는지, 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 결국 해보면 안다. 갈 데까지 가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두렵다. 두려운 말이어서 무거운데 가볍게도 날아가 버린다. 세상은 요지경이라, 그런 경고의 소리를 닿을 곳이 없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9-10).”
하여,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온통 사술과 점술과 요행과 운을 바라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현대사회가 어떻고, 최첨단 과학이 어떻고 하면서, 여느 가게가 뜯기고 새로 다른 가게를 열면서 저들은 고사를 지낸다. 문지방 위에 북어를 무명천으로 묶어 올려두었다. ‘입춘대길’과 ‘만사형통’을 적어 대문에 붙였다. 오늘도 우리는 미개한가?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13:9).” 모든 사람은 여전하였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오늘 본문은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덥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 네가 같이 힘쓰던 자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장사하던 자들이 각기 제 길로 흩어지고 너를 구원할 자가 없으리라(사 47:14-15).” 왜 우린 늘 당하기 전까지도 앞선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이에 오늘 시편은 아룀으로 우리 자세를 점검하게 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1).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우리 됨을 잊지 않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5-26).” 하면 오늘 같은 사회에서 누가 우리 같은 삶을 바라겠나? 저들 눈에 이러한 모습은 한심할 뿐이고, 우리는 주를 바라면 바랄수록 외톨이가 된다. 하나,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우리가 주를 가까이함은 더러 실패자 같고 무능력하고 바보 같으나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이 원리, 내가 아니라 주가 하시게 하여, 주가 나타나심으로 나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좋다. 오늘 시인은 능력 없는 집착이 우리 영혼을 어리석게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이는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내 의지, 내 뜻과 나의 판단을 뒤로 하는 것.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그리하여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이는 예수께서 그리하셨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오늘에 처한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어렵고 생활이 불편할 때에 도리어 알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 하여 이 또한 순순히 받아들임으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얻는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3).
우리를 결박하신 하나님의 의에 순응함이 온유함이었고, 온유하여서 그 심령은 가난하여 하나님으로만 허기를 달랠 수 있고, 긍휼히 여기는 자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낸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갈 4:13).” 일련의 약함이 나로 복음을 전하게 한다. 하여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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