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전봉석 2023. 4. 17. 04:36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4-15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종의 노래>다. 42장 1-9절에 이어 오늘은 두 번째(49:1-13절)이다. 지난 번 시점은 종의 성품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보증이었다면 오늘은 ‘부르심과 약속’을 주제로 한다. 복중에서부터 부르셨고 그를 주의 장중에 숨기셨다(1-3).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여 상심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인정하고 이를 조성하신다(4). 결국 그 사명을 다 할 때 영광과 승리로 채우실 것을 약속하신다(5-7). 곧 여호와가 정하신 날에 종을 도우시고 그 선민을 회복시키실 것(8)과 약속하신 곳으로 안전히 돌아올 것(9-12)을 알리며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13).

 

온 세상은 주의 구원의 소식을 들을 것이다. 본문은 모두에서 메시야를 연상하게 한다.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1).” 이 복된 소식은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48:20).” 페르시아 메대 왕 고레스를 들어 바벨론에서 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이 소식은 무려 고레스가 통치하기 150년 전의 예언이다. 이와 같은 실상은 오늘에도 교차한다.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알게 한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48).”

 

성경의 언어는 시대를 초월한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이에 사탄의 권세는 무너질 것이다. 이는 처음 사람 아담의 때에 하신 말씀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곧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8-19).” 그러므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결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면모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오늘 3절은 이를 함축하였다.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로 불리는 메시야에 대하여, 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5).”

 

이사야서를 성경 속의 성경이라 하는 이유는 구약과 신약이 한데 엮인 예언의 말씀이어서이다. 이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그렇듯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은 사명을 받은 자로 산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를 알았던 바울은 간절함으로 설교하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말씀이 내 삶과 동떨어져 저만치 걸려 있는 그림 같다면 혹은 읽고 듣는 이야기로 그저 감동의 한 장르에 불과하다면 이는 모두 헛되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2).” 그렇다면 나의 삶에 직접 개입되지 않는 성경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오늘도 성찬식을 거행하며 이를 기념한다. 곧 이는 참여다. 삶이고 직접적인 일상의 현장에서다. 나는 저를 먹어야 하고 씹어 삼켜야 산다. 마셔야 하고 이것이 내 몸에 돌아야 한다. 단순히 영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다.

 

이를 영적으로만 치부하면 우린 영락없이 교만하여진다. 그러하지 못한 자들을 비판할 것이다. 정형화되고 보수적인 교회를 비난하기도 한다. 자칫 경험을 드러내며 그러한 신비를 강조한다. 그러한 자신을 우월하게 여긴다. 소위 신앙이 좋고 영적으로 산다는 사람들의 처사가 그러하다. 사람들을 멸시하는 일도 거기에서다. 영적인 우월감은 교만의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 4절,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할 때에 이러한 종의 탄식이 자칫 우월감에서 나오면 더 큰 문제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위하며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이와 같은 증거가 우리 삶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우리로서 주를 바라고 산다는 일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으로만 내 삶이 붙들려서 사람들의 어떤 반응에도 굴하지 않는 것이겠다. 나로 하여금 종종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아무런 소득도 변화도 없는 것 같을 때, 더욱이 사람에게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때, 사탄은 속삭인다. ‘그래도 계속 할래?’ 그때에 말씀을 붙든다는 것,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결국은 주의 것이다. 어떤 결과도 내 몫이 아니다. 다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오늘 이 땅에서의 결과는 결과가 아니다. 당연히 오늘의 결국도 결국은 아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실 때에도 오늘이란,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저 어처구니없는 처사가 어찌 결국일 수 있겠나?(눅 23:34)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 개의치 않고 산다는 일은 놀라운 은혜다. 연약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이지만 그 육신의 연약함에 연연해하지 않는 일처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어제는 성찬예식을 거행하였고, 겨우 여섯 잔의 포도주와 여섯 개의 떡을 나누면서 나는 잠시 마음이 어려웠다. 가끔은 말씀을 전하면서 서너 명을 둘러볼 때, ‘그래도 계속 할래?’ 하는 내 안의 소리가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도 문득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에 세우신 열두 명의 제자와 그나마 한 명의 배신을 보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한 분, 저 한 사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에,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 18:12-13).”

 

오후께 나는 교회에 남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기도 하다, 한 영혼… 나 하나에게 …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9).” 오늘 본문과 같이, 누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나로 여기에 두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10).” 오늘 본문은 그리 확장하여 이 아침 나의 마음을 건드린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그럼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처럼 아침마다 나를 깨우시고 말씀 앞에 앉히시는 이가, 묵상을 하며 글을 쓰다 보면 그 어간과 어간 사이에 임하신다. 더하여 이를 읽을 때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산다. 그 마음은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는 마음으로’ 저가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하면 되었다.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사 49:11-12).” 주가 하실 일이고, 나는 다만 여기에서 그와 같이 두신 이의 뜻을 묵상하고 전하여 알게 할 뿐. 더불어 나 하나 온전히 주 앞에 서는 일에서도 무던함으로.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13).” 온 천하가 이를 순종할 따름이었다. 거친 봄비가 내리고 바람이 드센데 꽃잎이 떨어지고 새숨이 파릇파릇 돋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8).”

 

그리하여,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133:1).

 

하나님이 이루시는 만남과 그 안에서의 평안에 대하여.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2-3).

 

보배로운 기름, 예배를 타고 전하여지는 말씀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에게 명하신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이에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그렇게 하여,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