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이사야 51:1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편 135:2-3
왜 아브라함과 사라였을까? 왜 앞서 노아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을까? 보잘것없던 야곱을 위시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삼으신 것에 대하여 우리는 뚜렷한 답을 하기 어렵다. 왜 하필 나였을까? 오늘 말씀을 읽으며 이와 같은 원론적인 의문이 먼저 들었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1).”
하나님은 종말의 때에 시온을 회복시키시고 희락과 감사가 넘치게 하신다. 그 공의를 실현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됨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한다. 순종하여 저의 백성으로 삼으신 게 아니다. 주의 자녀들은 모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여 ‘의를 따라 여호와를 찾으며 구하는 자로 그에게 듣는다.’ 역사상으로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을 향해 증거 하시는 말씀이다. 왜 나로 주의 자녀 삼으셨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오늘 본문 2절,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이 일은 하나님이 임의로 하신 일이다. 어딜 봐도 아브라함이 그럴만한 자였다는 증거가 없다. 물론 저는 말씀을 받고 이에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순종하였다. 이 또한 주가 그리 하게 하셨음으로 그리할 수 있었던, 은혜를 받은 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외치시는 말씀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4).” 이를 읽으며 나를 향한 말씀인 것을 안다는 것!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신 30:8).”
이에 응할 수 있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 하실 때 이와 같은 꾸지람이 나를 향한 것임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이를 듣고 지켜 대비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전혀 그럴 리 없는 친구가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묻고 더욱 알려고 할 때 나는 종종 의아하다. 모두가 신(神)이라 하여 다원주의자였던 저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다는 데서 나는 놀라운 것이다. 더욱 내 안의 어떤 평정심, 현실은 여러모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 같은데 진득하게 또는 무던히 주어진 한 날을 감사하며 살아내는 것. 그렇듯 바울 사도가 살아낼 수 있던 날들이 기이하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4-27).” 당시 바울은 그럴 신분의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이 우리를 바꾸어 놓은 것일까?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고후 1:10, 딤후 4:18).” 오늘 말씀에서 나는 그와 같은 흔적,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사 51:1).” 나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한다. 마치 푸딩 한 스푼을 떠낸 것 같은, 저들 속에 같이 어울려 지내던 나로, 내가 속해 있던 그 자리를 생각한다.
이를 시인은,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시 129:4).
실은 내가 그였지 않나? 저와 같이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나 자신이 그 끈의 한 줄이었거나 묶음의 수레 줄이었던 나를 끊으셨고, 떠내셨다!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섭리를 나는 생각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럴 자격이나 어떤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오늘 본문 5절,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이제 주를 앙망하고 그의 팔에 의지하는 자로 살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이다. 누구에게 백날 권하고 알려 이러한 사실을 보여줘도, 저는 이와 상관없는 자로 여전하여서 더욱 희한한 쪽은 나 자신이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의 그 차이를 나는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때에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7).” 하시는 오늘 말씀이 생소하지가 않다. 나를 두고 이르시는 것임을 안다. 어찌 아는가, 알 수 없는 앎이다. 나도 모르는 앎으로,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8).” 곧 이는 오롯이 주의 주권 그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인 것을 알게 한다. 왜냐 물으면 답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 가운데서 우리는 산다.
성경공부를 하며 더욱 주를 알고자 하는 친구와 여전히 주를 멀리하며 살고 있는 친구 사이에는 어떤 이유가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누구의 설교를 듣고, 저마다의 간증을 재해석하여도… 그저 연기 같은, 해어지는 옷 같은, 하루살이와 같은, 그리하여 폐하여져야 마땅할 것인데,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 곧 우리로 하나님의 공의가 되어 구원의 공의가 실현되게 하신 것이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102:26-28)
어째서? 무슨 자격으로? 내가 왜? 하는 이와 같은 의문은 어느 훗날 주의 나라에서 주의 영광 가운데서 밝혀질 것이지만… 우리는 요즘 늙으신 장모의 생에 대한 애착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안타깝다. 모든 사람이 생에 대한 애착은 집착이 되어 억척스럽게 천년만년 살고자 하는 것이겠으나… 믿는 자로서는 이를 점검해야 한다. 삶에 대한 미련이 행여 구원의 확신이 없어 생기는 두려움일는지도….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사는 삶이어야 맞는 것인데.
오늘 말씀은 주가 행하신 일에 놀라움을 더한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9-10).” 왜 저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의 멸망에서 예외였을까? 저가 떠내어진 자리가 선명하게 눈에 그려져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아, 훗날에 다윗 왕의 증고조모가 되어진다. 라합이나 룻이나, 그렇듯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11).” 우리의 오늘과 내일은 어제의 나와 다르다. 내가 있던 자리는 선명한데 더는 내가 없는 기이함을 묵상한다.
나는 친구의 형을 좋아했다. 연대 의대를 나와 현재 가정의학과를 운영하는 의사선생인데, 일찍이 중고등학교 때 나는 저에게서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나 ‘친구’, ‘아름다운 사람’ 등의 노래를 듣거나 배웠다. 그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고 노동가가 어찌 불려지는가 알 수 없었다. 오늘에 이르러 친구는 예수를 영접하였고 형님은 여전히 술을 좋아하고 노동운동의 때를 읊조린다. 그러니까 여전히 어제에 사는 사람이 있고 두고 온 어제에서,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곧,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하시는 말씀으로 우린 오늘을 인내하며 내일을 소망한다. 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며 산다. 곧 우리의 문제를 아시고 항상 앞서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오늘 말씀은 되새기게 하여 허튼 것으로 두려워하는 것에 경각심을 둔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12).” 이를 알면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이 놀라운 변화에 새삼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 나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본문은 손짓하여 가리키는 것 같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13).” 저가 나를 붙들고 이르신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15).” 더는 낯설지 않은, 마땅히 부르고 찾게 되는 주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에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16).”
손위처남 내외가 다녀가고 뒤이어 친구내외가 다녀가면서 어제 하루는 부산하였다. 문득 주시는 생각으로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고, 턱을 괴고 앉아 누구는 이러하고 누구는 저러한지… 나로 왜 이처럼 귀한 사역을 맡기셨는지…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흔들어 흩으며 말씀 앞에 서곤 했다.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22-23).”
오늘 말씀이 새삼 나의 나 된 것을 돌아보게 하여 ‘나를 떠낸 자리와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게 하였다.’ 이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31:19-20).
나는 이를 삶에서 느낌으로,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135:2-3).
하는 시인의 찬송이 크게 와 닿는다. 이것이 나의 입술의 열매가 되었다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하여,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47:6).
이는,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5).
주의 위대하심 앞에 오늘의 문제들 또한 놀라운 섭리 가운데서 펼쳐지는 일일 것임을.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이는 이제 나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에 안도한다. 참 다행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135: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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