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23. 4. 18. 04:52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사야 50:5-6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인생길이 어렵고 사는 날이 곤궁하다. 있으면 있어서, 없으면 없어서 고달픈 것이 삶이다. 여기 오늘 본문에서는 그에 따른 인내를 배운다. 모든 고통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죄로 인함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책망하시고 구원의 능력으로 교훈하신다. 주를 의지함으로 구속하심을 얻는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그 최후 승리가 성취되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우리는 죄의 결과를 지고 산다. 오늘 1절의 말씀이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이처럼 죄의 결과를 안고 사는 삶은 고단하다. 가장 어려운 때,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심으로 악이 두터운가, 악이 두터워서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가?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며 다윗은 필사적으로 기도한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1).

 

어제는 같은 맥락의 시편 129편, 돌아오는 설교 본문을 되새기며 새삼 주가 주시는 인내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그리하였더니 오늘 아침의 말씀도 같은 주제로 열어주시는 것 같다. 인내는 고통 중에 나오는 생기다. 마치 운동하는 이들이 극한 고통에서 아드레날린이 확산되어 교감신경이 흥분되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과 같다. 인내하는 자에게서 생기발랄함이 나온다. 생동감이 넘쳐난다. 노동운동가의 만족함이 노사갈등을 겪으면서 더욱 고조되는 것과 같다. 인내는 우리로 꾸준하게 한다. 은근과 끈기를 유발한다. 가던 길을 멈추지 않게 하고, 그 걸음이 비록 완전하지 못하다 해도 무던하게 한 길을 가게 한다. 모든 분야의 장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속적인 것은 일관된 인내심을 발판으로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저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하는 깃발 아래 서있다. 예수의 공생애는 그 자체로 극한 인내의 실현이다. 이를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10-11).”

 

시편 129편의 시인은 아뢴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1).

 

이스라엘은 믿는 자의 대명사다.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그 생이 나른다면 이는 어딘가 문제가 있다. 느슨하고 느긋하여 느린 걸음의 경주자는 없다. 모든 믿는 자는 일찍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도 여러 번 겪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2).

 

어떤 어려움으로 우리는 어려움에 단련된다. 그런 중에도 우린 굴하지 않는다. 괴롭힘이 우릴 이기지 못한다. 이를 오늘 이사야는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사 50:2).” 우리 뒤에 숨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음을 알린다. 이는 주께서 우리를 구덩이에서 건지심이다.

 

결국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고통 중에 삼킨 바 되어서야 요나는 이를 알게 되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욘 2:5-6).”

 

인내는 진득함으로 한 길 가게 한다. 바울의 고통이 바울로서의 길을 온전히 걷게 하였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마치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하는 작품과 같이 가난한 노동자의 필사적인 생애와 그가 마주하였던 숙명적인 가난과 병마를 그린 자전적인 소설로 안다. 고난은 우리로 단단하게 한다. 하여 바울은,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

 

이에 그 생이 아무리 고통스러워,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129:3).

 

이와 같이 잔인하고 의도적인 괴로움이라 해도,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4).

 

우리로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은 믿음으로다. 굳센 믿음은 우리의 의지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단련하여 연단함으로 점점 더 굳건하여진다. 이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8-19).” 곧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엄청난 권능을 믿음으로 지니고 산다. 그래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적당하고 양호한 삶에 안주하지 않는다. 모든 압제의 날을 능가하는 더 끈질기고 단단한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이를 바울은 건축 용어를 사용하여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곧 우리 믿음의 권능은 어떤 고난보다 더 질기고, 그 어떤 고통보다 끈기 있으며, 절망이 뛰어 넘을 수 없는 높이의 방어와 깊은 슬픔보다 더 깊은 소망이 있다.

 

이에 오늘 이사야와 같이 간구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이로써 우린 놀라운 경험을 살아가는데,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5-6).” 말씀에 귀가 열림으로 나를 때리는 모욕에도, 수염을 뽑는 수치와 뺨을 맞는 노여움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다. 이내 침 뱉음의 수모를 겪으면서도 우린 얼굴을 돌리거나 가리지 않는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129:4).

 

우리의 믿음은 이 모든 결국의 결국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곧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5).

 

저것들이 얼마나 하찮고 별 거 아닌가 하면,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6-7).

 

고작 지붕 위의 풀과 같이 자라지도 못할 것들로 벨 것도 묶을 것도 아닌 지극히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정도여서,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8).

 

그저 하찮은, 그러다 말 것을 두고 우린 당장 그 문제로 씨름할 것이 안 된다. 아내와 둘이 예배를 드리며 나누었던 말씀에서도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고작 우리가 상대할 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2).” 젖먹이 어린아이와 같은 것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신세라니! ‘내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도 이렇듯 살지 않는다!’ 하고 돌아가자, 하고 길을 나섰던 탕자처럼… 어쩜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사사로운 것으로 얽매여서 남은 생을 탕진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 본문 이사야서는 맞춤하니 주가 더하시는 음성으로,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50:7).” 이제 좀 알아야 한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8).” 상대할 가치도 없는 것을 붙들고 씨름하느라 너무 진이 빠진다. 더 이상 ‘친정엄마’로 어찌할까? 하고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말자고 당부하였다. 이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9).” 곧 오늘 우릴 어렵게 하는 것들은 하찮고 보잘것없는 지붕 위의 풀과 같이 벨 것도 묶을 것도 없는, 가치 없는 문젯거리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10).” 우리의 초강력 권능은 믿음으로였다.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11).” 우리를 괴롭게 하는 고통이 외려 주를 찬양하게 경배하게 할 것이다.

 

오늘 시인의 기도도 그러하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1).

 

사는 동안 밤이 찾아오고 더는 어쩔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우릴 엄습한다. 그러할 때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예수께서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아직 시작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한 밤에,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2-3).

 

온통 말씀은 오직 한 길만을 제시한다. 그쪽은 예수가 걸어가신 순종의 삶이다. 오늘 이사야는 이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50:4).” 우리 귀를 여셨다. 상상을 초월하는 온유가 인내다. 그 어떤 것도 비길 수 없는 것이 인내가 주는 평정심이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우리의 무기는 우리의 연약함이었다.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온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

 

이미 자라기도 전에 마를 풀과 같고(시 129:6), 끊어진 줄 같은(4), 지붕 위의 풀 같은 고통으로 오늘을 시름시름 앓다 갈 것인가? 도리어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2-13).” 곧 오늘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들은 그만한 가치도 없는, 상대할 게 안 되는 정도여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하면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이에,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138: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