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사야 52:7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26
택한 백성에 대한 구속과 회복을 전하는 내용이다. 시온으로부터 깨어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티끌을 털어버릴지어다.’ ‘일어나 앉을지어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하는 표현을 덧붙여 회복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값없이 팔렸다. 우리 삶에 우리가 정신을 팔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한다. 죄에 대해 각성하고 구원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하시는 말씀 앞에 멈추어 서야 한다. 돌아보아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두려워 떨어야 한다. 한데 우린 너무 겁이 없이 산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사 52:1).” 오늘 불러 세워 말씀이 촉구하는 바를 듣지 않고 개의치 않을 때 우리 영혼은 고단하다. 사는 내내 고달프기만 하여 우리 안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앞서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51:17).” 경고의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모를 때 우리 삶은 그 자체로 사는 게 지옥이라. 정들면 모든 지옥 같아서… 누가 애완견이 죽고 우울감을 호소했다. 우리의 비인격적인 관계가 어디까지 확산되어 무엇을 사랑이라 하고 어디에서 행복이라 해야 하는지, 분간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잠 1:28-30).”
곧 하나님과의 단절이 비인격적인 관계에 감정도 마음도 그 영혼까지도 빼앗기고 사는 것이다. 애완동물들을 떠받들고, 애착인형이니 하는 것들과 분리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상세계에 빠져들고, 게임에 몰두하며, 허구적인 이야기나 영화에 몰입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 영혼은 구제불능상태의 허망한 것을 사랑하고 추구한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정작 무엇이 무서운 일인지… 그 결과 어떤 결국이 초래하는지, 갈 데까지 가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누가 개를 화장하는 데 있어 염을 하고 상복을 입히고 어디에 입관하여 화장하는 사진을 보여주는데 뭐라 할 말을 잃었다. 뭐라 한들, 그 일로 자신의 슬픔에 함몰된 영혼은 정작 무엇이 자기 영혼을 좀 먹고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깨어나라.’ ‘떨치고 일어나라.’ 하고 성경은 촉구한다.
믿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는데 이를 상실하거나 왜곡하고 사는 삶에 대하여 누가 뭐래도 저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자기 말에만 동조하고 다독여주기를 기다린다. 그런 우리에게 ‘네 힘을 낼지어다!’ 하고 오늘 본문은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크신가? 누군 자신이 좋아하고 기다리는 피규어를 구하지 못해 우울해한다. 누군 게임에 몰입하여 하루가 다 가는 것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우리에게 맡기신 인간관계는 상실되고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은 묵살되고 있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시 44:5-6).
요즘은 누구라도 말을 듣지 않는 데서 나는 침묵한다. 무어라 일깨워 전할 말이 없다. 뭐라 하면 감정부터 상하고 정색을 하고 달려든다. 나이 든 자나 나이 어린 자나 매번 같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고 사는 것보다 불우한 게 없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3-34).”
저들이 누구이어야 하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3).”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씀에 귀 닫고 마음을 값없이 팔아넘겨 엉뚱한 것으로 채우고 사니, 오늘 우리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거룩하라, 하시는 데서 우린 무너진 자신을 보아야 한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이처럼 말씀 앞에 세우실 때, 나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언젠가 우리는…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우리가 덧입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설마 그 위에 누더기 같은 이 땅의 허영과 자기욕구를 덧입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사 52:2).” 오늘 말씀은 각성과 회개와 회복을 촉구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매일 아침저녁으로 씻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듯이 몸뚱이도 그러한데 우리 영혼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친구가 주일 오후 내내 성경공부를 한다고 힘들다고 토로한다. 아침 아홉 시에 나가서 성가대연습부터… 언제부터 자신이 그리 되었는지 희한해하면서도 그 가운데 기쁨을 알지 못한다. 듣다보니 평소의 삶은 피곤할 따름이다. 시간이 없다. 늘 회사에서 현장으로 오가야하는 저의 일상이 ‘팔자 좋게’ 성경을 묵상하고 읽고 들을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저녁에는 여전히 간단하게 회포도 풀어야 하고… 그런 삶이 평생을 지탱하고 온 것이니 하루아침에 고쳐질까만. 나는 우리 영혼도 몸도 같이 아침저녁으로 씻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는데 저는 먼저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얼마나 바쁜 줄 알아? 하고 사회생활의 애로사항을 호소한다.
안다. 내 안다, 하고 주님은 그 호소를 아시고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이 구원은 하나님이 주권이고 강권하심으로이지만 이를 돌보고 다스리고 정복해야 하는 일은 우리 영혼을 위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한데 여전히 종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술자리를 작파할 수 없다. 저들에게 믿는 자로서의 티를 내기 뭐해 얼버무리며 뭉개고 있다. 부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앞서 누군 늘 성경을 가까이 하고 나름 믿는다고 믿으면서 개를 장례하며 그 슬픔을 호소하였다. 나는 욕지기가 나올 것 같이 화가 난다. 그런 자신을 멀쩡하다고 여기면서 슬퍼하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긴다. 개인적인 기호를 존중하고 그 선택을 우선하는 데 온통 마음이 가 있다. 그러자니 뭐라 들려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반면에 친구는 면박을 주듯 내가 뭐라 야단칠 때 예전 같으면 뭐라 욕을 퍼붓고 기분이 상했을 텐데, 아 그래? 하고 몰랐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 어찌 해야 하나? 하고 묻는다. 둘의 차이는 간단하다.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31-33).”
우린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너무 복잡하고 얽히고설킨 관계로 교회가 시스템화 되었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매뉴얼대로 움직이면 된다. 목사는 말씀 전하는 자로서의 일보다 사교와 친목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었다. 목양이 중요하나 주객이 바뀐 듯하다. 설교원고 작성도 생략하고 것도 하루 낮 시간에 ‘해치우는 일’쯤으로 여겨진다. 그런 뒤 내내 바쁘다. 앞서 친구의 호소가 들리는 듯하다. 너무 바쁜 날들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오늘 말씀도 이를 일깨운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도 되는, 혹은 안 해도 되는 일을 두고 주객이 전도되어, 것도 그럴 것이 교회도 운영해야 하는 기관이고 사람과 사람 관계도 사회성이 우선일 테니… 이를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인기 많은 목사는 어딘가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우르르 따르는 교회도 어딘가 문제가 있다. 나의 편협한 생각은 돈이 돈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큰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이겠다. 뭐라 하자는 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하는 오늘 시편의 찬송이 나는 왜 큰 소리로 우릴 불러 세우는 것 같을까? ‘하늘의 하나님’인 것을 우린 너무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너무 흔한 은혜의 시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하나님이 너무 편하고 익숙해서 그런 것일까? 너무 함부로 가장 막 대해도 되는 존재인 것처럼, 안 믿는 자로 살지도 못하면서 믿는답시고 자기 좋을 대로 믿는 믿음에게…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곧,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138:7).
알긴 알고 있는 것인지?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사 52:8).”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또박또박 읽혀 듣게 하신다. 하여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11).” 부디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사는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12-13).”
이 놀라우신 인자하심 앞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고개를 들 수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1).
이로써 우리가 산다. 살아가고 여전히 살고 있을 수 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이는,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89:5).
이는 우리의 사명이고 전부이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 23).
그리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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