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전봉석 2023. 4. 21. 04:41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고난을 받는 종의 노래>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당하시는 고난을 예언하고 있다. 이 글이 쓰인 후 700년 후에 이 일들은 실현되었다. 앞서 52장 13-15절은 그 서곡이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나라들이 놀라고 왕들이 놀랐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보잘것없는 저의 외모와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수모를 묘사한다. 종의 고독하고 처절한 대속의 수난은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 곡해하고 이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성취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알 수 없는 일로 우리를 왜 이처럼 사랑하시는지, 궁극적으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하시는 부분에서 눈물이 찬다. 우리 이성과 상식을 초월하는 믿음의 세계다. 결국 그의 영광을 알려면 우리도 그의 고난에 참예해야 한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존귀하게 되리라(52:13).” 하시는 선언으로 시작되었다. 근본 하나님이 보시기에 존귀한 자이시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49:5).”

 

하나님과 동등된 자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이로써 성취하시고자 했던 것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의 상함과 찔림은 우리 죄로 인하여서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우린 무릎을 꿇는다. 모든 입으로 주라 시인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하여 이 일은 믿음의 세계에서 가능하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하여 저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고는 저의 영광을 알 길이 없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이와 같은 말씀의 공식 앞에서 조바심이 난다. 나는 이를 받을 수 있을까?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이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하여 바울도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할 때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그와 함께 하는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가령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를 받아 나는 자주 기도한다. 장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겪는 여러 불편함을 두고, 아내에게도 자주 이르는 것은 ‘친정엄마’가 아니라, 주가 우리에게 맡기신 ‘한 영혼’으로 받는다.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어떤 어려움을 우리는 ‘주가 뜻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으로 듣는다. 종종 나는 식물의 자리를 옮겨주고 창가의 햇살을 듣게 하고 바람이 스쳐 잎사귀가 흔들리게 한다. 저는 가만히 그 놓여진 자리에서 생명을 지킨다. 받아들임으로 처한 모든 상황을 순응한다.

 

예수님이 전하시던 말씀도 그리 들린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내가 날 위해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내가 주를 위해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이와 같은 성경의 역설은 우리의 일상과 거리가 멀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거듭 몰아붙이시듯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4-25).”

 

우린 할 수 없으나 우리로 할 수 있게 하시는 이의 권능으로 한다. 믿음의 세계는 때로 어처구니없이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이라,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하필 어린아이… 저는 배우고 익히며 자라갈 것이고 받아들임으로 성숙해져 갈 것이다. 곧 우리가 이미 얻었다 하면 더는 받을 게 없는 것과 같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이 말을 할 때에 바울은 이미 노인이었고 로마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이를 생각할 때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 그의 목적은 분명하였다. 단지 이 땅에서의 생으로 전부라면 굳이… 하나,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이는 성경의 원리이고 오늘 본문의 내재된 뜻이다. 그리하여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를 알고자 하고 살고자 하면 믿음의 세계에서이다. 이성의 나라에서는 감히 접근할 수도 없는 진리다. 성경공부를 하고 뒤늦게 교회 봉사와 성가대를 하는 친구에게 ‘좋아?’ 하고 물으면 ‘모르겠어.’ 하면서도 그리 하게 되는 자신을 두고 신기하게 생각한다. 단지 아내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이처럼 열심히 하려 하는가?’ 하고 물으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모르겠는 세계가 정상이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6-8).

 

이성과 상식의 나라에서 그러한 우리를 조롱하고 비웃는 것은 당연하다. 입을 삐쭉거리며 머리를 흔들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정상이다. 외눈박이들만 사는 나라에서 두 눈을 가진 자가 비정상인 것일 테고,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이와 같은 비상식의 세계는 이해받을 길이 없다. 주의 길을 가고, 주의 일을 한다는 사람이 구차하게 사는 모습이나 더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될 때, 이 일은 안 믿는 자의 빌미가 된다. 믿음이 약한 자들로 갈등의 이유가 된다. 우리도 더러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오늘 본문의 총체는 이해 밖의 이야기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전능하신 성부께서 성자로 ‘이 일을 당하게 하셨다.’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어찌 이를 원하실 수 있었을까? 이를 실제 일으켜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성자는 어처구니없이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서 우리의 구원을 속행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는 오늘의 나로 이처럼 이른 새벽에 주 앞에 앉아 말씀을 붙들고 턱을 괴고 앉아 더욱 알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일로도 희한하다. 혹사당하듯 일주일 내내 일터에서 시달리다 일요일 하루 늘어지게 몸을 쉬던 그 맛에 살던 이가 이제는 성가대를 하고 예배에 참여자가 되고 오후께는 남아 성경공부까지 한다!

 

스스로도 놀라운, 이해할 수 없는…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는 그 결과이다. 어찌 나 같은 자를 위하여, 하고 묻다, 내가 오늘 어제의 나와 다른 것에서 답을 얻는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전에는 ‘귀신 들린 자’로 병든 영혼을 알지도 못하고 살았던 우리들을 돌이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나를 짊어지신 것,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하여 저는 오늘 본문에서 이르시는 바,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 놀랍고 비밀한 말씀 앞에서 나는 오늘의 나로 감사하게 된다. 주의 긍휼하심을 되새기게 된다.

 

그때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채우시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길을 통하여 교회를 이루어가며 생활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 나는 늘 수혜자로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주의 뜻을 살핀다. 주가 행하시는 일이 언제나 선하시다. 나의 어려움도 역경도, 고난으로 우리는 생기발랄하게 주 앞에 선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그것이 나른한 날에 느끼는 그렇고 그런 만족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하여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이를 위하여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나는 종종 내가 하는 일이 너무 없어 송구하고, 그나마 엉터리 같아서 면구스러울 뿐인데,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하실 때에 나는 더 이상 비굴할 게 없다. 더욱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시는 이 말씀이 내 것이 되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송구하고 면목이 없으나 감사함으로 자유하게도 된다. 이에 오늘도 우린,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37:1).

 

하여,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2-3).

 

수욕과 모욕을 당하나,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8).

 

세상이 아무리 우릴 슬프게 하고 노엽게 한다 해도,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우린 주 앞에 고한다. 그러면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7-8).” 우리로 선과 악을 분별하여 뚜렷하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참 놀라운 사실 하나, 고난이 우리로 춤추게 한다.

 

하여,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35:28, 57: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