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전봉석 2023. 4. 23. 05:2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6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편 139:7

 

 

 

인내가 우리로 활달하게 한다. 은혜는 고난 중에 빛난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두울 때에 더욱 간절하다. 누구는 십삼 년째 엎드린다. 아이는 여전하여서 그 구실이 어렵다. 모든 길을 막으시고 미어지는 마음 하나로 주 앞에 무릎 꿇리시는 하나님이 때론 가열(苛烈)차다. 가혹하고 매워서 도망치고 싶은데 끌어당기는 힘이 불가항력적이다. 누구는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데 믿음의 동산에 꿈나무를 심게 하시고, 누구로는 사방이 우겨 싸임을 당한 것 같이 가난과 병마 가운데서도 주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과 저들로 함께 기도하게 하시는 이의 뜻이 하나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우리로 이 자리에 부르시기까지 우리의 거역함이 얼마나 무례한지,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하고 되물으신다. 이어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하고 약속하시는, 오늘 본문은 구절구절마다 절절하다(2). 고만고만하게 살길 바라지만 적당할 때에 시험이 온다.

 

아내가 맥없이 풀썩 쓰러질 때 저는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주께 호소한다. 기도로밖에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주의 이름으로 그 입술을 채운다. 내가 아는 내 주변의 주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루할 겨를이 없다. 생동감이 넘친다. 나른한 오후가 없다. 바울은 이를 일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저라고 이 고통에서 낫기를 기도하지 않았겠나? 저는 연거푸 바라였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단호하셨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

 

말이 좋지 누구라고 이와 같은 고난을 달가워하겠나? 한데 저의 고난은 인내로 춤을 추게 하였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고통이 기쁨이 되고, 약한 것이 자랑이 되었다. 온전치 못한 자식으로 잘난 듯 세상을 활개 쳤을 저는 날마다 교회에 붙들려 기둥이 되었다. 누군 저의 말할 수 없는 연약함으로 기도로 버티며 대안학교를 이끈다. 누구는 저의 넘치는 가난으로 교회를 이루어간다. 나는 내 곁에 있는 저들에게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본다. 상대적으로 그래서 누군 교회를 결국 떠나고, 목회를 접고, 주어진 사명을 포기하고 사업가가 되었는데…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나도 나의 약함을 사랑하는 이유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우리로 주 앞에 서게 하는 것,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3).” 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실현되는 사람들을 나는 안다. 나는 저들로 인해 마음이 아프다. 어제는 이런저런 소식에 서러워서 입을 삐쭉거리며 하나님 앞에 서러워하였다. 좀 너무 하시지 않나요? 하는 마음으로만 툴툴거리는데, 그것으로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주께로 가까이하며 들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하면 너의 영혼이 살리라.’ 하시는 말씀이 내 곁의 사람들에게서 실현되고 있었다. 목사로, 교장으로, 묵묵히 엎드려 기도하는 사모로 저들의 영혼을 살리시고 계셨다. 이는 저들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았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우리의 추악하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시다니! 우린 그저 어떤 자들이었던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26:22).” 본디 그리 살기를 꿈꾸지 않았던가? 나른한 오후 같이 서로 둘러앉아 남의 애기나 하며 군것질거리로 삼는 삶을 꿈꾸었는데, 그 뱃속을 뒤집어엎어 거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시다니! 나는 종종 내 곁의 어려운 사람들과 그럼에도 저들의 사역이 이율배반반적이어서 운다. 어제 나의 눈물은 그런 의미였다. 감사도 원망도 아닌,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하나님의 처사가 못마땅하여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래서였나? 점심을 먹고 내려와 순간 발을 헛딛으며 나자빠졌는데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바닥에 찧은 무르팍인 것 같다가 허리인 것도 같고, 어깨인가? 애매한 통증이 가시면서 하필 그 앞에 소파가 있었고, 순간적으로 낙법을 배운 사람처럼 소파에 어찌 반쯤 몸을 얹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백 가지도 넘는 감사가 스쳐갔다. 만약 소파가 아니었더라면, 머리가 그대로 바닥을 찧었더라면… 하는.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상이어서 또 얼마나 감사한지…. 고난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일깨운다. 일순간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을 본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 총체적인 은혜에 대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아, 이 놀라운 은혜가 호두 같이 두꺼운 고난의 껍질 속에 들어있다. 이를 깨는 데 그처럼 오랜 시간이 혹은 가혹하고 매서운 고난이 일격을 가한다. 껍질은 우리 고집이며 아집이다. 자신을 부인할 수 없어 자기 십자가를 거절하게 한다. 하나,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 4:7).

 

이와 같은 찬송이 나의 것이 되게 하시려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그리하여,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36:8).

 

우린 어쩔 수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아니다. 마지못해 기도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설령 그러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 해도 그러하여서 누구보다 주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다. 나는 어제 오전에 속상하여서 그리 서러워 울다, 그 눈물이 곧이어 감사로 이어지는 데서 항복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기이한 섭리다. 오늘 본문은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4-5).” 이 구절의 참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는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며 위하여 기도할게, 하는 인사로 서로를 문안한다.

 

이에 본문은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6).” 그렇듯 찾고 부를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복이었다. 하여 고난은 인내하게 하고 인내는 우리로 춤추게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하는 ‘바울’들이 내 곁에 여럿이어서 감사하였다. 최소한 내가 사랑하고 배우며 닮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러하다. 어젠 누구와 통화하면서, 그래서 난 요즘 잘 먹고 잘 살고 목회 잘하면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이 제일 어렵다! 하고 말하였다. 저들의 적절함과 넉넉함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렘 15:16-17).” 한데,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119:92-93).

 

나의 약함이 아니면 내가 주의 말씀을 이처럼 필사적으로 붙들려 했을까? 나의 이 비루함이 나로 주 앞에 기도하게 한다. 내 곁의 안타깝고 답답하고 한심하고 처량한 인사들이 그럼에도 주를 찬송하는 데서 나는 또 한 번 산다.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하여 나는 두 손 든다. 승복한다. 살려주세요, 하고 엎드린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9).” 이를 인정함으로 나는 비로소 알겠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11).” 말씀이 헛되이 전하여지거나 들려지지 않게 하시려고, 나의 연약함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하여,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2-13).”

 

이 놀라운 반전을 사랑하게 하신 이를 나는 더욱 사랑한다. 할 때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아! 나의 이 외마디 비명에 감탄과 감복이 담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139:2-3).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신 이가,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4-5).

 

나를 세우셨다. 내가 원하여 가는 길도 아니고 하겠다고 해서 할만 하여 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아는 것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115:3).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면, 하나님이 행하실 것임을 잘 안다. 난 분명히 못한다고 그 난리를 떨며 먼 길을 돌아 실컷 도망쳤었다. 그런 나를 끌어다 앉혀 기어이 사용하시는 것이면, 볼품없으니 어떤가? 보잘것없으니 또 어떤가? 아무런 성과도 누구처럼 보란 듯 한 부흥은커녕 나 하나 운신하기도 빌빌거리는 것이면 또 어떤가?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말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말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럼 됐다, 오늘까지다. 난 모르겠다, 여기까지다. 주가 행하실 것을, 행하셔야 하실 것을 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나는 종종 누구에게 목사 같지 않은(?) 소리로 위로한다. 너무 애쓰지 마라, 잘하려고 하지 마라, 주가 하시게 둬라! 이는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6).

 

내가 이제 알겠는데, 난 잘 모르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주께 숨는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만 부르고 눈물을 흘린다. 다음 말이 다 무슨 소용이람!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5-6).

 

나는 이를 넙죽넙죽 누리며 산다. 아무 공로 없이, 하는 일도 없이 뻔뻔스럽게도 감사하게, 나는 다만 주 앞에서 주접을 떤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더는 바보가 아니다. 내가 뭘 더 잘했다고 하나님이 더 큰 사랑을 더하실까? 어림없는 소리.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139:7).

 

너무 뻔한 걸,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됐다, 그럼.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3-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