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사야 56:7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시편 140:6
어떤 어려움으로 우리에겐 염려와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곧 닥쳐올 것을 알린다. 주의 날을 준수하고 악을 멀리하게 한다. 하나님의 초정을 받아들일 자와 이내 미루어 둘 자가 갈린다. 선민으로서 경계에 서서 사는 일이 때론 위태로우나 이로써 여호와를 경외하게 한다. 구원에 합당한 삶을 바라게 된다.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하시는 오늘 모두의 말씀은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시는 말씀에 주목하게 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일이란 때로 현실적이지 못하다. 믿음이 들고 나의 삶에 구원은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믿음이 출생이라면 구원은 성장이다.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 ‘공의만 따르라’는 말씀은 세상 연락을 즐기고자 하는 데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린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일까?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주의 뜻을 따라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끊임없는 갈등에 사로잡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길이 맞나? 남들 다 괜찮은데 나만 유난을 떠는 게 아닐까? 하고, 그래도 이 길을 갈래? 하는 우리 안의 소리가 우릴 자주 주저하게 한다. 더욱이 오늘 2절 말씀은 굴레 같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주일을 휴일로 여기는 한 왠지 주일을 지킨다는 일이 손해 보는 일만 같다. 앞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믿음을 받아 구원을 얻었다고는 하나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가끔 우리 딸애가 기특하다. 출퇴근 왕복 세 시간 거리를 묵묵히 직장을 다니고 주일에는 또 섬기는 교회까지 그만한 거리인데 이를 마다하지 않는다. 주일학교 교사와 청년부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늘 즐겁게 다니는 게 말이다. 소위 사역자도 아니고 사례도 받는 것이 아니면서… 주일에는 무슨 모임까지 끝나고 오면 평소보다 늦다. 그럼에도 이를 감사함으로 행하는 것은, 주일은 굴레가 아니가 복의 통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권이다. ‘복이 있다’는 1절의 말씀이 여서 실현이 된다. 아무나 이 주일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06:3).
하실 때,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9:1-2).
하는 시인의 노래에 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뭔가 다른, 어떤 추구함이 같을 수 없는 우리의 가치관에서 견고한 소망이 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우리가 그의 후손인 것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40:1-2).
그와 같은 발돋음이 주일이었다. 성도는 이 날을 딛고 발돋음하여 한 주간을 산다. 외려 이 날을 기다리는 이유다. 이 날은 그 어떤 선물보다 귀한 영생의 한 날 한 날에 들어간다. 예수님은 이에 성전을 정화하시며 외쳐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 오죽하니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발만 들이는 사람, 어떤 다른 꿍꿍이가 있어 오는 사람, 교제와 친목을 다지려는 사람, 그저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도하는 사람들’로 묵묵하게 자리를 다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이에 저들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교회로 채워진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이 일 저 일에 밀려서 주일은 항상 뒷전인 경우가 있다. 이는 말씀을 온전히 받지 못한 것으로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과연 우린 그러한가? 여기에는 막중한 사명이 있다. 오늘 본문 7절,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시고 이어서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8).”
즉 아직 돌아올 자가 있어 교회는 존속한다. 이를 주께서 제자들에게 위임하시며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하나님은 이 일를 이루시기까지 교회에 머무신다. 이로써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우리에게 두신 일이다. 우린 증인으로서 산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48).”
교회를 이루어 가는 일은 그 어떤 데서 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실현됨을 본다. 때론 교회가 아니면, 목사가 아니면 이보다 못한 벌이를 하며 살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이는 모든 목회자들이 갖는 공통점이다. 여느 적당한 규모의 담임목사가 아니면 부교역자나 개척교회 목사로 산다는 일은 그야말로 혹사당하는 삶이다. 법적 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를 받고, 예배에 말씀 전하는 일 외에도 모든 잡일을 다 하는 게 저들이라… 나는 종종 동기들이나 여느 부교역자로 생활하는 목회자들의 생활이 경이롭다. 나야 더 이상 돈벌이는커녕 밥벌이도 포기한지 오래라, 그날그날 주시는 데서 얻고 취하며 산다. 이때 생생한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역사는 아무나 체험할 수 없는 기이함이다.
건 그런데 아내가 고생이라. 사모가 무슨 죄가 있어서 미안할 따름이라, 주께 더욱 고하게 되는 사람인데… 가끔 아내는 투정처럼 자신이 언제 목회자와 결혼했나? 사모가 되겠다고 했나? 하며 쪼들리는 생활을 두고 핀잔을 한다. 것도 그런 게 난 죽어도 목사는 안 한다고 하고 결혼을 했더랬다. 우리 딸도 자신은 늘 사모만큼은 안 한다고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목사는 사명감으로 붙들려 산다지만 사모들은 생고생이라, 나도 그 심정을 안다. 목사의 복이 오십이라면 사모의 복은 백이다. 그래도 신기해하며 감사해하는 일은 지난해부터 목회자 사례비로 우리 교회처지에 무려 50만원씩을 아내에게 주고 있다. 성도 숫자나 헌금으로 치면 말도 안 되는 액수이다. 여기서 임대료에 목회활동비까지 포함하여 넉넉히 감당하며 사는 우리 교회는 진짜 부자 교회다.
복이란 ‘기도하는 집’에서 밥벌이도 한다. “들의 모든 짐승들아 숲 가운데의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으라(9).” 하고 후히 건사할 수도 있다. 한데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10-11).” 이와 같은 말씀에서 여느 교회를 운운하려든다면 찔리는 게 많은 시대이다. 하나 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일 테고, 주신 바 우리는 세우신 자리가 우리의 복이 되었다. 나는 목사가 되고 일체 내 명의의 카드도 적금도 없다. 내가 나를 잘 알지만, 있으면 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갈 위인임을 인정한다. 안 그럴 자신도 없다.
처음에는 그처럼 싫어하고 반대하더니 이제는 아내 특유의 억척스러운 천성으로 교회의 한 축을 감당한다. 이상하게(?) 이런저런 ‘아픈 사연’으로 연결되는 이들이 우리 교회에 여럿이다. 누구는 줌으로도 예배드릴 상황이 못 되어, 그 처지를 두고 본인이나 나나 주의 긍휼하심만을 구한다. 아이는 신발부터 이어폰, 안경에 헤어스타일까지… 고질적인 충동구매로 여전하나 주일만큼은 목숨처럼 귀히 여긴다. 것도 나는 참 신기할 따름이다. 병적으로 그러는 것이니 여러 문제를 두고 일일이 뭐라 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면 주일에도 자기고집대로 안 올 법 한데, 항상 보면 가장 먼저 늘 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신기하다.
주가 하시는 일이다. 교회를 이룬다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뭐 좀 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사람은 없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겔 33:7).” 때론 듣기 싫은 말로 또는 정색을 하고 전하여야 하는 입장에서, 나는 그래서도 말씀으로다. 그러느니 항상 나를 경계하는 게 우선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119:36).
나는 기도한다.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3).” 병원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어나가고 교회에서 영혼이 가장 많이 상처를 입고 떠나간다. 이는 아차, 하는 순간의 일이면서 때론 우리 의지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하여 우리의 첫째 행함은 부지런함이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주 안에서 열심을 품고 사는 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나는 삼백육십오일 새벽 일찍부터 교회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나 파수꾼은 그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하는 것일 터, 부디 나의 모자람은 주가 채워주실 것을 믿으며….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
이에,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140:4).
나는 기도한다. 곧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전 2:5, 엡 6:3).”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기도하는 자로 가만히 눈을 감고 주여, 하고 부를 때 눈물이 고이는 것은… 스치며 떠오르는 어떤 이의 사연과 저의 눌린 영혼으로, 혹은 어떤 이의 처한 상황과 그의 절박함으로. 때론 나의 고단함과 우려와 염려 근심으로 인하여, 주님! 하고 가만히 부르면 나는 자꾸 눈물만 흐른다. 이때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신 이에게 기도한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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