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전봉석 2023. 4. 25. 05:32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57:19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편 141:3

 

 

 

모든 불화의 화근은 말에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사람 관계가 참 묘한 것이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녹기도 하고 얼어붙기도 한다.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잠 24:26).” 말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말은 전적으로 상대를 향한다.

 

‘입술의 열매’로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는 선포가 오늘 말씀에서 붙든다. 자고로 많은 말들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을 위시하여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덕치와 노자의 이상국가론에 이르기까지, 말과 말로 사람이 사람을 나라가 나라를 다스리기도 하고 침탈하기도 하였다.

 

본디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말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본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하였던 말이 이간질하는 죄의 말로 인하여 불화하게 하였고,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고로 오늘 우리의 사명은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권세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를 위하여도 말의 위력은 대단하다. 나는 내가 말에 덕이 없는 사람인 것을 잘 안다. 짓궂은 말과 행동으로 나를 감추는 데 익숙하였던 유년시절을 거치면서 막말과 빈말을 농담처럼 쏟아내며 살아왔다. 요즘도 불쑥 튀어나오는 욕지기는 맛난 것 같이 혀끝에 찰지게 붙어 달다. 그만큼 익숙하였던 말과 말 사이에서 나는 몸부림을 치기도 하였다. 한 입술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욕을 퍼붓기도 하는 것을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시편을 살고자 할 때 더욱이 말의 진중함을 되새기며,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 120:2).

 

기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63:3).

 

이와 같은 삶을 위하여도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잠 4:24).” 곧 우리는 말로 인한 괴로움을 호소할 수 있는 존재이다. 번민은 사람의 고유 권한이다. 사람만이 번뇌한다. 욥은 그 끔찍한 고통 중에도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하여 저는 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기를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14:14).”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만이 이에 그 마음을 괴로워하고 단속하며 참고 인내하며 기다린다. 그 어떤 동식물도 번뇌하지 않는다.

 

막말이 생겨나는 주재료는 고통에서이다. 고난으로 인하여 함부로 말이 새나오고 이는 더욱 화를 돋우며 막말은 저주나 원망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월요일에는 다음 본문을 두고 묵상하는데 시편 130편은 소망에 대해 다루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30:1).

 

첫 구절부터 암울한 기운이 느껴진다. ‘깊은 곳’, 인생에 있어 나락(奈落)이라 일컫는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의 상황’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 고통이 가해지면 욕지기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무의식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된 말의 오염도는 상스럽다. 그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를 주께 아뢰며 말을 물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후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우린 순간 ‘주여!’ 하고 하나님을 찾는다.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66:14).

 

저절로 그리 되기까지는 몇 가지 연단이 필요하다. 첫째는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물론 모든 고난은 절대적이어서 누구의 어떤 고통과도 서로 견주어 놓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인생에서 고통이 없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성경 어디에서 예수 믿는 자들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신 곳이 없다. 그렇다면 고난을 다룰 때 하나님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시편은 기도로 알려주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130:2-3).

 

마치 당연하다는 듯 고난의 의미가 주께 있음을 아는 어조다. 한데 우리 현대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고난을 인정하지 않고 놓아두지 않는 데 있다. 즉각적으로 이를 해결하거나 부정함으로 없던 것으로 만들려고만 한다. 병원에서 모든 질병을 그리 다루고, 심리학에서는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갖 안정제를 투여한다. 문제는 즉각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여겨 고통 자체를 거부한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도 무통분만이나 제왕절개를 유도한다. 시편은 우리에게 ‘깊은 곳에서’ 어찌 대처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문득 떠오르는 인물은 의당 욥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을 마주하면서 고통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하나님이 죽이실 것이고, 더는 희망이 없다 해도 욥은 그래도 주께 아뢰겠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바울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즉 오늘 판단 받듯이 고통이 우릴 가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괴로울 따름이지만, 심지어는 ‘죽여서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과 같이 정죄당하는 것을 막으신다.’는 소리다.

 

내 주변에 여럿 어려운 사연을 접하고, 이런저런 일로 ‘누구 때문에’, 혹은 ‘내가 처한 문제’ 때문에 나는 요즘 괴롭다. 저의 사연을 차라리 몰랐으면 모를까, 이 꼴 저 꼴 안 보고 살 수 있으면 모를까…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더해도 답이 없다.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나 하나 건사하지도 못하는 일이라… 이와 같이 우리의 번뇌가 아무리 깊고 또 크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인자하심이 그보다 더 깊고 크시다. 이를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하여 나는 더욱 의미를 부여한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때 기도하게 되고, 기도는 우리에게 더하시는 충만함을 담아내는 주머니를 열게 한다. 그러므로 고통이 왔을 때 두 번째는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이다.

 

셋째, 고난으로 기다림을 연마하기.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130:4-6).

 

‘대상을 두루 생각함.’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행위.’ 이는 사유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다. 그렇다면 다시 오늘 우리에게 두신 ‘깊은 곳에서’의 남모를 고난은 하나님의 사유하심에 의한 것이란 말인데… 그래서도 시인이 택한 방식은 기다림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달라진 모습은 ‘하나님이 다 뜻이 있으시겠지!’ 하는 것이다. 어떤 질병이 찾아왔을 때 우린 그 원인을 찾고 식습관을 고치고, 운동을 강조하며, 건강관리에 더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 하여 ‘기다림’을 선택한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27:14).

 

이를 못하겠을 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옛 생활로 돌아가기 일쑤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고 세상을 좇아 해결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하는 것이 옳다(욥 35:14). 그리하여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고통 중에 있거나 고통을 아는 사람은 이런 말, 기다림을 매우 끔찍하게 여긴다. 그럴 만큼 ‘깊은 곳에서’ 홀로 고통 중에 있어본 사람은 안다. 하나는 못 견디고 뛰쳐나가거나 하나는 체념하여 자포자기하거나. 그러나 주의 권능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다면 믿고 맡김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이다. 이를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이고 그러할 때에 말을 삼가 사람에게 떠벌이지 않는다. 상대를 겨누어 총구를 들이대지 않는다. 다만,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130:6).

 

밤새 망루에 서서 뜬눈으로 밤을 샌다. 새벽이 오면서 추위는 더 고통스럽다.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이 가장 잔혹한 시간이다. 우리는 항상 고통에 노출되어 산다. 불교나 철학 등 타종교는 그리하여 고통을 관념의 세계로 몰고 간다. 속세를 떠나 고통 속으로 숨는다. 자기 안에 감춘다. 왈가왈부하지 않고 자신이 떠안음으로 없던 것으로 삼는다. 그 품이 넉넉한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절간의 고즈넉함과 그 자르르한 풍경소리를 사랑하였다.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향내는 심신을 달래는 것도 같았다. 한때는 그렇게 어디 여행을 가면 꼭 그 어디 절을 찾아 적막강산에 녹음이 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어쩌면 아주 어릴 때 조모와 함께 절 생활을 몇 개월 했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 성경은 와장창, 나의 상념을 깬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사 57:1).” 인생이란 그처럼 모진 것이어서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2).”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의 땅에서는 ‘편히 쉼’이 복이다. 시편 130편과 연관 지으면 ‘깊은 곳에서’의 ‘편히 쉼’이란,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말하지 아니함은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쇠약하여지지 아니함이라(10).” 갑자기? 앞서 모든 화근은 주를 경외하지 못한 이유였고, 하면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18).” 그럼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130:7-8).

 

이를 다시 오늘 본문으로 연결지어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19).” 곧 우리가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 네 번째는 주를 경외함으로 주께 고하여 그 입술의 열매를 맺는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으로 문제를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근심보따리를 풀어낸다. 말을 원 없이 퍼붓듯 쏟아내도 괜찮다. 그러면서 고난의 문제, 그 실체와 마주한다. 직면하면서 스스로의 민낯을 보는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감추고, 괜찮은 척, 하고 살았던 것들에 대하여… 이를 인정한다. 인정하면서 받아들이게 된다. 낫고자 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하는 데서 은혜였음을 안다.

 

그래서 난 요즘 기도하려고 기도 중이다. 날이 풀렸으니 철야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의 성전에서 기도하다 잘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접이식 침대 하나를 주문했다. 가만히 주 앞에 앉고 눕고 잠이 드는…. 아내를 설득하고 장모에게 잘 말씀드리고 오해가 없도록 하고 그리하려고…. 어차피 내가 지켜야 할 자리는 교회라.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141:1).

 

우리가 처한 이런저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람?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2).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3).

 

부정적인 말, 행여 사람을 죽이는 말과 살리는 말이 설마 한 입ㄱ술의 열매로 자라가지 못하도록….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8).

 

주가 더하시는 나의 이 간절함으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