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전봉석 2023. 4. 26. 05:25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사야 58:1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편 142:1-2

 

 

 

형식주의는 신앙이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빠진다. 교회에서의 생활이 다르고 가정에서의 생활이 다르고, 여럿이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가 다르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함은 자신을 기만한다. 스스로도 자신을 분간하기 어렵다. 종교적인 열심과 참 신앙의 본이 다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경계하셨다. 직업적인 사역은 위선을 토대로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할 때는 악한 자를 쫓아내야 한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10).” 즉 교회 밖의 사람들을 두고 뭐라 하는 게 아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11).” 저는 형제요, 교회 안의 사람인데 그러하다면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12-13).”

 

마침 어제는 이를 읽고 아내와 장모와 함께 말씀을 나누었다. 안 믿는 자들에 대하여는 우리가 어찌하겠나?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위선적이면 저들은 치리하고 다스려야 한다. 이단이나 그릇된 것을 진리로 여기면 무리에서 쫓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가 쉬운가? 교회의 치리가 무색한 시절이다. 저들은 이를 은혜로 덮는다. 버젓이 표절을 하고 음행을 하고도 목사라는 이유로 어떤 권위를 갖는다면, 오늘 본문은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사 58:1).” 단호하다. 견책해야 한다.

 

이는 가족 중에도 적용이 된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레 19:17).” 곧 외면하고 모르는 척 두면 이것이 내 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 하고 성경은 실제 우리 삶의 지표를 일깨운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서로의 안부를 묻고 문안함이 즐겁지 않은 것은 그 생활이 여전하여 다시 같은 말을 할 때인 것 같다. 이래저래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하여 모처럼 전화를 하여 어떤가? 하고 물었을 때 전과 다를 게 없다는 것에 속상하였다. 한참 의욕적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할 이들이 마치 나른한 오후 같다. 무사한 한 날의 만족으로 족한듯하다. 그나마 파트사역을 하고 요즘은 또 특별새벽기도기간이라, 그러고 나면 하루 종일 ‘집돌이’가 된다. 자신이 가진 재능도 있고 아직 나이도 젊은데 왜 그러고 있나, 하고 뭐라도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안타까웠다.

 

누구의 일로 또는 어떤 이의 어려운 중에도 주를 바라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였다. 우리가 얼마나 큰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아차, 하는 순간에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 더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오는데. 누구 일로 마음이 어려울까 하여 회피하고 지내다가도 불쑥, 성령이 찌르시면 다시 연관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아시고 이를 책망하신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마치 칭찬하시는 듯하다.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길 알기를 즐거워한다. 또한 의로운 판단을 구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바랐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금식도 한다. 여러모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진정하지 않다면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3).” 자신이 하는 데 따른 자신들의 자부심과 달리 개 버릇 남 못 주는 격이다. 그러다 누가 이를 경계하면 할 거 하고 한다는 소리로 궤변을 일삼기 일쑤다. 누가 저더러 금식을 하라고 했나? 저들은 자신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예수님의 지적을 알기나 할까?

 

그러면서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눅 20:47).” 어딘가 어폐가 있는, 그러면서도 괜찮다고 여기는 데야 뭐라 더 이른들. 오늘 말씀은 안 믿는 자를 경계함이 아니다. 믿는다고 열심을 다하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 7:6-7).”

 

이를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나는 어떠한가? 하고 되묻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그런 중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 이를 듣고 정작 찔려야 하는 이들은 분해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이 회개한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2-3).” 두려운 일은 여럿 앞에서의 ‘나’가 아니라, 혼자 있을 때의 ‘나’이다.

 

내 속에 감추고 있는 어떤 마음, 과연 나는 주 앞에 온전한가? 정작 없는 중에 주께 드려 감사하는 이는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하여 외려 주 앞에 송구해하는 것…

 

가령 나는 누가 후원을 하거나 무엇을 선물하였을 때 이를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주 앞에 송구해하며 감사할 뿐 저에게는 달리 고맙다는 표시도 조심한다. 가령 전에 언제 모 선교사를 후원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가 다달이 모은 돈을 다른 이를 통해 전달하였다. 서로 어찌 알았는지 저는 황송할 정도로 고마움을 표시하였고 매번 선교보고(?)를 하였다. 나는 그러시지 마시라 하며 더는 가까이 할 수 없었다.

 

마치 나는 당연하다는 듯 받는다. 내가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주가 갚으실 것이다. 저가 나를 보고 준 것이겠나? 만일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받을 게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드린 것이면 주의 것으로 주가 갚으신다. 나는 이를 준수하려 한다. 드려진 것도 받은 것도 모두가 주님에 의해서이다. 받는 나는 당연하다는 듯, 주는 이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이는 전에 어느 한 사람의 후원으로 신학 학부를 공부할 때에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나는 늘 그에게 고마워하였고 그를 볼 때면 어떤 부채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5학기를 연거푸 학비며 장학금을 받을 때였을까? 저는 내가 신경 쓰는 것을 두고 부담스러워하며 이런 말을 했다. 내 것을 주는 것이면 의당 공치사를 하겠는데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전하셨을 뿐, 내 것이 아니어서 내가 더 민망하다. 그땐 그 의미를 다 몰랐다.

 

정작 주의 이름으로 주는 이는 이를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 정작 주의 이름으로 받는 이는 이를 마땅하게 여긴다. 우리가 교회를 이뤄가면서 거의 외부의 손길로 유지되는 셈이지만 서로는 그 일을 몰라라 한다. 고맙다는 말을 저에게 하지 않는 것은 주께 저를 아뢴다. 고맙다는 말을 저는 한사코 거절하는 것은 주께 드린 것이어서이다. 속으로 고마운 것을 밖으로 표현해야 할 때는 서로의 인간관계를 위한 것이고,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서는 서로가 모르는 척 하는 게 옳다. 모르겠다, 나는 그리 대하고 가급적 저에게 감사 표시를 삼간다. 대신 주께 송구하여 저를 위해 빈다. 나는 갚을 길이 없다. 받을 자격도 없다. 그럼에도 채우시고 입히시는 일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우신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의당 나는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드러내어 함부로 고마움을 표시할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나는 주로 받는 쪽이 되는데 때로는 뻔뻔할 정도로 당연하게 여긴다. 주가 채우시는 것이고, 주의 교회를 위한 일이다. 가끔은 아내가 고맙다고 해! 할 때, 그리 되면 내게 한 것이 되어 날 보고 준 것이 되면 안 되지 않겠나? 우리가 외식하는 자로 산다는 일은 이처럼 복잡 미묘한 일들을 주의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영락없다. 티를 내고 생색을 내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물리치지 않으면,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사 58:4).”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가 널 위해 어떻게 했는데, 하는 마음은 부모로서 자식에게도 드는 것이어서 심지어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 이를 셈하듯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두렵다. 장모는 노인이라 그럴 테지만 전에 교회에는 얼마씩을 냈고, 누구에게 얼마를 줬다 하는 것을 다 기억하고 산다. 언젠가 이를 듣다 넌지시 말씀드렸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주 앞에 어찌 행하였는지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난감한 일이다.

 

정작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두려운 일은 그래서다. 오히려 기억도 없는데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5-36).” 하실 때에 오히려 난감해 하며,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

 

외식하는 자들과 의인들의 차이는 기억하고 생색내는 것과 이를 잊고 알지도 못하는 차이가 아닐까? 다만 우린 누린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사 58:9-10).” 이와 같은 주가 함께 하심을. 하여,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11).”

 

더욱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정작 파수꾼은 크게 하는 일이 없다. 활동적이지도 않다. 다만 새벽을 기다릴 따름이다. 망대 위에 서서 망을 보고 위험을 알리는 게 고작이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나야말로 그저 송구할 따름이다. ‘내가 뭐라고’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러한 생각조차 민망하여 입을 다문다. 기다림은 속수무책이 아니다. 내가 할 일을 안다. 소망하는 자는 무던하다. 무던한 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소리에 스스로 둔감한 자로 산다. 이는 고립이 아니라 집중이다. 파수꾼의 본분은 주께 집중하는 것이다. 시편 130편 6절이 나머지 7-8절을 안고 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6).

 

이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7-8).

 

기다림과 바람은 외식하며 남에게 보이는 것에 연연할 겨를이 없다.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누가 날 보고 예수를 믿는다고? 어림없는 소리로 사람이 사람을 선동하는 주장이다. 사람보고 예수를 따랐다가는 영락없이 미끄러진다. 다만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주가 나의 모든 죄에서 속량하셨다는 사실 하나이다. 주중에 계속 다음 주일 본문만 들여다보는, 나는 파수꾼이다. 그리하여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58:14).” 이는 주가 하신다. 그래서 다윗은 굴에 숨어서도 굴하지 않았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142:1).

 

소리 낼 수 없는 중에 소리 내는 신앙으로,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2).

 

아닌 경우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게 돼 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하지만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 오직 말씀으로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오직 말씀만 가지고, 그리할 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1).

 

하여,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142:3).

 

그러할 때,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