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전봉석 2023. 4. 27. 04:4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59:21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8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살 때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없으시다. 거짓과 악독이 분리를 가져왔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원한다면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본문은 이로 시작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1).” 마치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은총을 부으시는데 엎어놓은 종지 같아서 담아낼 수 없는 게 불순종이다. 곧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슥 7:112-13).”

 

이는 참 두렵고 무서운 상태다. 그땐 몰랐다. 그러다 보니 고난을 회피하고 상처로 남을 탓하며 내 안의 소리에 귀 닫고 눈 감고 덮어두려고만 하였다. 죄는 달콤하였고 나의 아집은 자유로운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확연하여서,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 66:18).

 

그때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지 않으면 상처는 덧나고 고난은 봇물 같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 같이 나의 기도는 주의 응답을 소망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심으로,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5:4-6).

 

그리하여 죄악을 보지 못하신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은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 위함이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5-26).” 결국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을 단절시켜 하나님의 은혜를 차단한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신 31:17).”

 

이에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러므로 달리 복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하면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더는 우리와 그리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성자 하나님의 희생과 약속에 의해서도 다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지 못한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2-4).

 

주가 다 아신다. 더는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다. 시편의 세계는 그렇듯 고난으로 우리가 주 안에 거함을 상기시킨다. 그때에 고난을 감내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해명하거나 피하라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그 고난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출입하시도록 혼자 앓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고 알려준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130:1, 4).

 

나는 매일 시편의 세계에서 기도와 찬송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게 된다.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 마다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살 수 있었는가도 알겠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었다.’ 곧 모든 고난의 까닭이 하나님이셨다. 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를 사용하셨다. 오늘 이사야 5절에서,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하는 이 원리가 죄의 원천이었다. 우발적인 악이란 없다. 본래 우리 안에 있던 것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자체를 일컬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하나님은 이를 두고 보실 수 없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0).” 우린 주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1).” 이처럼 죄의 결국을 아심으로 우리를 그대로 두실 수 없다. 우리로 온전히 더욱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며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고난 앞에 세우신다.

 

우리의 고난이 아무리 심연 깊은 곳 같다 해도 반드시 바닥은 닿는다. 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한 번 뒤집히지 않으면 그 깊은 데서 솟아 오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는 더욱 구체적으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를 우리로 할 수 있게 하시려고 고난을 두신다. 모진 태풍이 지나가고 바닷물이 뒤집힐 때 더러운 오물이 물러간다.

 

그렇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이사야 59:21).” 언제나 함께 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실제 우리 일상에 동행하신다.

 

나로 오늘에 묶여 사는 것처럼 두시는 것에서, 나는 이제 말씀을 붙들면서 안다. 몇 년 만에 누구에게서 전화가 오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서로의 간격이 얼마나 벌어졌는가를 알 수 있었다. 같은 동시대를 살고 같은 일상을 공유하는 것 같으나 저는 여전히 ‘거기’에 나는 이제 ‘여기’에 있었다. 그 차이를 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말은 헛돌고 어느 순간에는 예전에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불편해진 것을 느꼈다. 이는 반갑지 않았다는 것도 그립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그땐 그랬지, 하는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하는 것을 요즘은 어떤가? 하고 저와 나 사이의 하나님의 존재여부에 따라 갈렸다. 서로의 관점도 그리고 소망하는 지향점도 전혀 다른 방향인 것을 알게 되면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한동안 끔찍이도 옛일을 떠올리고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그때를 소중히 여기며 살았던 적도 있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3:3).” 우린 마냥 감상에 젖어 살 수 없다. 소망은 막연한 기대와 다르다. 희망은 그러하여서 더러는 요행을 바라나 소망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고 붙든 것이다. 곧 나의 전부가 되었다. 하여 이제는,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25:4-5).

 

하여 오늘 시편의 세계에서 나는,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143:8).

 

달리 더는 의지하거나 붙들 것을 찾지 않는다. 이는 고난의 심연에서 요나가 깨달은 것과 같아서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그것을 물고기 뱃속에서 알았다. 곧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반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왕상 8:47-48).” 고난을 우리로 기도하게 한다.

 

나의 어려움, 어떤 고단함이 주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겔 18:27-28).” 고난이 주는 유익이었고 내게 두신 ‘가시’로 나를 주의 전에 머물게 하심이었다. 그리하여 주를 찾고 그러므로 주 앞에 엎드렸다. 더는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다는 데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한데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18, 20).” 먼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143:1).

 

주를 부른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그러므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2).

 

나의 약하고 속됨을 주가 아시나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하면 주의 도움만이 간절하여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럴듯한 게 참 많다.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고 선을 행하며 산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통화가 끝나고 생각하였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5-6).

 

아니었으면 나도 여전히 거기에 있었을 것인데, 하여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77:10-12).

 

돌이켜 나로 여기 있게 하신 주의 은총에 모든 걸 바친다. 그러하기를 기도한다. 어디가 아플 때, 또 어려울 때, 그래서도 주를 바라며 주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143:7).

 

그리하여 나는 나의 남은 생이 모든 일심으로…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8).

 

그러함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10). 아멘.